‌EXHIBITION & CRITIC

2010

부산의 발견  
Boosting the Mid 2010 
부산시립미술관
Busan Museum of Art

 

1997

개인전 
Solo Exhibition
동백아트센터     
Dongbaek Art Center

축제속의 인간, 인간 속의 찬미
송만용

Human Beings in Festival, Admiration in Human Beings       
Song Man-Yong

1997

개인전 
Solo Exhibition

동백아트센터    
Dongbaek Art Center

집합으로서의 인간군상  
유준상
A Group of People as a Gathering
Ryu  June-Sang
  

1991

개인전
Solo Exhibition

갤러리 에띠엔느 드 꼬장
‌Galerie Etienne de Causans, Paris, France 


전준자, 고요한 미의 세계
삐에르 브리쎄

Joon Ja Jun, Art of Silent Beauty
Pierre Brisset 

1991

개인전
Solo Exhibition
갤러리 에띠엔느 드 꼬장
Gallery Etienne de Causans, Paris, France
 
 

전준자의 작품 세계       
신항섭
‘The World of Jun, Joon Ja's Art 
Shin Hang-Seop  

2010

‌부산의 발견 Boosting the Mid 2010  / 부산시립미술관 Busan Museum of Art

2009

정년퇴임 기념전 Meomrial Solo Exhibition of Retirement / 부산대학교 아트센터  Art Center of Pusan National University

유재길  Yoo Jae-Gil

미술비평, 전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Art  Critic 

모두의 마음을 함께하는 시각예술-축제                                                            유재길

  초기 서정적 추상 예술세계에 이어서, 30여 년 넘게 전준자 교수님의 화폭에는 인간 형상을 담은 ‘축제Festival’가 그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수님의 얼굴은 언제나 밝고 활기찬 표정으로 항상 축제를 준비하고 펼치는 모습입니다. 축제는 그야말로 행복한 삶의 표현이며 풍요에 대한 기원과 감사, 하늘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축복과 행복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축제를 교수님은 창작의 고통 속에서 변함없는 마음으로 30여 년 간 화폭에 담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왔습니다.
  이번 교수님 정년퇴임 기념전은 아마 단순한 회고전에 초대하는 의미보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함께하자는 성대한 축제의 마당일 것입니다. 일상적 삶과 창작의 고통, 그리고 교육자로서 활동 등을 보여주는 전시에서는 고립이 아닌 서로의 교감과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각예술의 축제에서 교수님은 미(美)라는 신비의 세계와 교감을 통해 모두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축제’의 열린 마당은 그 동안 오랜 시간 연구하고 제작하였던 미의 양식적 특성이나 주제 변화를 한 곳에 모아 놓고 있습니다.
   ‘축제’의 시기별로는 1)각 면 공간 속의 인물(1982-1991), 2)청색과 녹색의 인물 표현, 3)흰색과 연두색의 인물 표현, 4)병렬적 인물(1997- ; 송만용 교수 분류)로 나눕니다. 여기에는 각 시기별 양식적 특성과 생명의 활기를 담은 작품들이 펼쳐집니다. 오랜만에 볼 수 있는 화려한 시각의 축제이며,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예술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입니다. 아마 그곳은 보들레르가 말한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며, 화려와 고요, 즐거움”으로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토피아 같은 시각예술의 ‘축제’에서 우리는 “회화만의 고유한 맛,”과 동시에 “육체의 흔적을 통한 정서적 체험”(미술평론가 전승보)을 하게 되며, 더 나아가 “고요한 미의 세계”(미술평론가 삐에르 브리쎄)와 “시대를 초월한 마음의 표현”(장석원 교수)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번 ‘축제’는 삶과 영혼을 꿈꾸는 시각 예술의 장이라는 해석의 의미와 함께 교수님의 말처럼 “통일 된 것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구속 받지 않는 순수의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후배로서 필자는 교수님의 행복과 건강을 빌면서 ‘축제’의 영원성과 ‘축제’를 통한 상처 난 사람들의 마음이 치유되길 기원해 봅니다. 

‘Festival’ – Visual Art sharing in All Our Minds                                Yoo Jae-Gil

  Since the lyric abstract art in the early stage, the paintings of Professor Jun have contained “Festival” taking after human’s features for the past 30 odd years. And the Professor Jun looks cheerful and spirited from beginning to end with making an arrangement for the festival and celebrating it. Festival means, in literal sense of the word, the expression of happy life, prayer and thanksgiving for abundance, and grace of Heaven. Professor Jun has embodied such beautiful festival full of blessing and happiness on her paintings in suffer of creation and unchanged mind for the past 30 odd years and asked a great many people to her festival.
  This memorial exhibition of Professor Jun’s retirement under the age limit will be the stage of festival sharing in all our minds rather than the invitation to a retrospective. It is important to sympathize and open the mind with each other not standing alone in the exhibition showing our daily life, the suffer of creation, and the activities as an educator. In this festival of visual art, the Professor wishes to share our minds with each other through the mystic world and mutual sympathy by beauty. Particularly this open stage of ‘Festival’ displays the history of the Professor’s art in a space including the features of aesthetic mode and the shift of main theme that had been studied and produced for a long while.
  ‘Festival’ is divided into as follows from the viewpoint of period: 1) Characters in the space of each section (1982-1991); (2) Representation of characters by blue and green color; (3) Representation of characters by white and yellowish green; and (4) Parallel characters (1997-) (source: Professor Song Man-Ho). The features of mode by period and the art-works filled with vital energy are unfolded before. This is a magnificent visual festival in a long time and a special stage where nature and human are mixed and the sympathy between nature and human is realized. The exhibition room may be the very place of “everything is crowded with order and beauty; magnificence, silence, and pleasure” as mentioned by Baudelaire.
  In “Festival” the visual art like utopia, we may undergo “unique taste roosted in paintings” and at the same time “emotional experience through the traces of body”(Art Critic Jeon Seung-Bo); and furthermore find “calm aesthetic world” (Art Critic, Pierre Brisset) and “representation of mind aloof from time” (Prof. Jang Seok-Won). Besides the meaning of interpretation “Festival is the visual art stage dreaming life and soul,” as the words of professor, we are able to feel “pure freedom and composure not bound by anything with casting away the unified restraint and at the same time to share them with each other. Lastly as her junior I wish the Professor’s happiness and health; and the eternity of ‘Festival’ and the curative properties of “Festival” against wounded hearts.

전승보  Jun Seung-Bo

큐레이터, 미술비평 | Curator, Art Critic  

만남, 기적의 순간                                                                                                 전승보



"내용이란 어떤 것의 일별, 스쳐지나가는 섬광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요. 아주 작은, 내용 말입니다." - 윌리암 드 쿠닝 -  

 있는 그대로의 경험
 "비평가가 예술가의 작품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일종의 번역작업이다. 작품을 번역하는 것은 그림에 담긴 명백한 의미와 독자의 요구가 어긋난 것을 해결하기 위함이다."라고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말한다. 비평가가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강조해야 하는 것들은 그림에 대한 결코 끝날 수 없는 해석(번역) 작업임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작품에서 내용이 따로 있다는 환상을 더 할 뿐이고, 작품에 접근하는 것이 해석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손택이 강조한 바대로, 예의 있는 해석이 되기 위해서는 작품에 파고들면서도 그것 자체를 파괴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은 관객들이 작품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의 형식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하며,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감성을 회복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비평의 기능에 대해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라며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부빔(rub)'과 같은 일종의 '성애학(erotics)'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예술작품을 이해하기보다는 교감하는 것이 더 필요하고, 작품 해석이 지닌 양면성(작품에 대한 해방과 훼방)을 극복해야만 한다. 있는 그대로를 경험한다는 것.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우리는 철이 들면서부터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보다 해석하는데 지나치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축제에서의 만남
 전준자는 자신의 오랜 화두이자 주제인 '축제'를 '만남'과 함께 동의어처럼 사용한다. '만남' 그 자체를 작가는 '축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그가 이 주제에 매달린 이유는 인생의 근원적 물음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답변이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만남-희열-축제-대화-평화'라는 일련의 순차적 반응이다. 때로는 다툼과 괴로움이 만남의 여정에 끼어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원함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축제는, "우리는 무엇을 생전 처음 보거나 맛보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며 게다가 그 첫 만남이 멋지다면 그 충격은 무어라 형언키 힘들 정도이어서 그 순간 감격과 감탄이 어떤 외마디 또는 몸짓으로 저절로 터져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예술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긍정의 만남이 지닌 찰라 같은 희열이 축제이며 곧 예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만남을 작가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작가의 축제에서는 지나친 해석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섬광'. 전준자는 예술작업에서의 기적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것이 만남과 축제이다. 이것이 그가 지난 30여 년간 이 주제에 천착한 이유가 될 것이다.
종교적 기도와 같이 새로운 만남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면모를 지닌 전준자의 그림은 사유와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 모든 종교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내세관과 인연의 필연성을 가지고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가는 갈등을 풀어내는 첫 구절을 만남의 축제라는 것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모든 만남은 "애초부터 이생과 기적적으로 조우한다."는 그의 표현대로 삶과 인생은 만남을 통해 만들어져나가는데 있다는 것이 그렇다. 그의 드로잉과 화면에서 느끼는 서정성과 표현성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힘든 '삶'이지만 그것조차 사랑해온 그이기에 수많은 그 인간 군상들의 만남을 한배에 탄 가족으로 공동운명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준자의 축제 그림은 기도하는 자기 자신의 자화상인 셈이다.

새로운 생명
 색과 선이 생명인 그의 회화들은 드로잉에서의 살아 움직이는 '날 것'같은 생명력과, 색채에서, 마치 열망하는 고흐의 색에 대한 그것처럼, 열정을 뿜어낸다. 세월이 흘러오면서 어두운 갈색과 청색 계열의 색채에서 점차 밝은 빛의 세계로, 밝은 드로잉의 세계로 나가는 양상은 색채의 신비함과 강렬함을 한층 더 추구하는 모습이다. 특히 드로잉에서 색채를 사용하는 요즘은, 고흐의 화면에서 색채가 지닌 균형과 조화의 탁월함과 같이, 그만의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낸 듯하다. 혼색의 탁함이 없는 것이나 순색의 느낌 그 자체의 생생함은 드로잉을 하나의 '완벽한 회화' 그것으로 만들어 낸다. 동양화론에서 말하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드로잉에서 예술가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밭을 매는 농부와 다름없다. 자신을 낮추는 모습.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 있는 모습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전준자의 드로잉은 그래서 생명력이 살아있는 하나의 독특한 작품으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1969년 정신적 지주였던 부친(전태련, 부산 혜광고등학교 설립자)의 타계 이후, 서울생활을 떠나 부산에 다시 정착한 전준자는 어린 시절에 함께 생활했던 삼촌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소중한 첫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무렵 유년기 시절에 샤갈의 그림 < 산모 >를 본 이후 가지게 된, 그림에 대한 신비스러운 생각들은 지금까지 그의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런 기억들은 대학 시절 이후 현재까지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변화를 겪어왔지만 여전히 짙은 서정성을 지니게 한 원천이 되고 있다. 축제에서의 만남이 서정적인 표현으로 드러나는 그 깊은 연유를 짐작하게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서정성, 자연성, 시적인 감흥을 중요시 여기며 소위 중앙화단의 새로운 미술운동의 주류에서 외따로 떨어져 부산에서 활동한 전준자. 그래서 추상그룹운동과는 단절되고 말았지만 이런 점에서 작가는 오히려 한국현대미술사적 위치에서 그 중요도가 재평가 받게 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얻을, 그때의 축제를 기다리자.


Meeting, the Moment of Miracle                                                     Jun Seung-Bo



“Contents is a glance of a certain, a flash going pass by. It is a small thing. It is a word meaning very small” - Willem de Kooning -
 
Experience as it is.
Susan Sontag said, “It is a kind of translation when a critic comments on a work of art. Doing a translation on a work of art is for solving the crisscross between the implication contained in the picture clearly and the need of viewer” The things that a critic should emphasize on for making out the contents are not different from the interpretation (translation) work on a picture which never comes to an end and. If things go wrong, an interpretation may call an illusion that a work of art must have other contents; and the approach to a work of art is nothing but for interpretation itself. What we should direct our attention to is that as the main point of Susan Sontag, in order to be a courteous interpretation, digging into a work of art must not destroy the work of art itself; the viewer should pay attention to the mode of art rather than understanding the work; for keeping the keen sensible experience, we should recover our sensibility; and for doing so, we should learn how to see, listen to, and feel more than.
Additionally Susan Sontag said, “For the function of criticism, “An interpretation is a kind of revenges by an intellectual against art and the world. An interpretation is a work making the world incapacitated and dried up for erecting a shadow world called “Meaning” and we do not need to get an interpretation showing the meanings of a work of art but what is needed is a kind of ‘erotics’ like our emotional ‘rub’ on the work of art.” That is to say, what we need is to sympathize rather than to understand the work of art and is to overcome two sides (freedom and interruption with a work of art) involved in the interpretation. Experiencing as it is but this is not easy as words. This is because we have become used to interpret everything rather than to accept it as it is ever since we could remember.
 
Meeting at Festival
Jeon Jun-Ja uses the term, ‘Festival’ her longtime topic and theme and ‘Meeting’ as if a synonym. This is because she regards ‘Meeting’ itself as if ‘Festival.’ The reason why she has pursued the topic for several decades is because it is the answer to the ultimate question of life as an artist. What she attaches importance to is a series of response of ‘Meeting- Gladness-Festival-Conversation-Peace.’ From time to time unexpected trouble and agony are intruded into the journey of ‘Meeting’ but such is not the intent of the artist. She expresses the artistic festival what she thought is that ‘if we see or taste something for the first time in our life, it may be difficult for us to express it by words; if the first meeting is so nice, the impression of it is beyond description. So at that time the exclamation or strong feeling is taken the place by a outcry or gesture unconsciously. This may be the very expression of art.”
That is to say she defined that the passing gladness involved in the positive meeting is the very ‘Festival” and “Art.” She advises us, “accept at it is.” We should keep an eye on an excessive interpretation in connection with this artist’s ‘Festival.’ Jeon, Jun-Ja expressed the moment of miracle in her art work as ‘A Flash passing by.” This is ‘Meeting’ and ‘Festival.’ This is the very reason why she has inquired into this topic for the past thirty odd years.
The picture of Jeon Jun-Ja with continuous inquiring aspect on a new meeting as a religious prayer is based on speculation and introspection. She, of course, has the future life and inevitability of fate that are come into view to every religionist but above all she finds the first clue enabling to disentangle a knot from the festival of meeting. As she mentioned that ‘all meetings encounter to this life as a miracle,’ living and a man’s life is formed through meeting. It is possible to image where the lyricism and manifestation enabling us to feel from her drawing and picture is started from. It would be ‘laborious life’, but she loves even it, so she is able to accept the meeting of a large group of people as the community of destiny like family in a boat. Jeon Jun-Ja’s picture of ‘Festival’ is the self-portrait saying her prayers.

New Life
The lines and colors, the souls of her pictures, spout out fervor from the life force as if ‘flying’ in her drawing, which remind us of those impressed from the colors of VAN GOGH. As the years go by, the phase marching forward the world of brighter light and the world of brighter drawing from dark brown and blue colors gradually looks like pursuing the mystery and intensity of color much more. Recent her use of colors in drawing is seemed to create her own unique technique as the excellence of balance and harmony displayed in the colors of VAN GOGH. Her drawing not giving the feeling of muddy color caused by compound color but displaying the vividness of only solid color creates ‘the perfect paintings’ itself. Her drawing may fall under the ground of “Fresh and Vivid Vigor” mentioned in the Oriental painting. The moment when an artist does its best in drawing is not different from that of a farmer cultivating the soil. We can find the state of lowering oneself and performing one’s duty here. Thus the drawing of Jeon Jun-Ja must be regarded as a unique work of art with the life force.
After her father (Jeon Tae-Ryeon, the founder of Busan Hyekwang High School), who was her spiritual mainstay, was passed away, Jeon Jun-Ja was to depart from Seoul and settle down in Busan again. She still has a clear recollection of art influenced by her uncle at an early age. In her childhood she saw < A woman in childbed > of Chagall and the memory remains till now in the source. These memories have gone through diverse changes from her campus days to the present works of art but work still as the origin of her deep lyricism. From this it is possible to guess one of the strongest reasons why such lyric manifestation covers the meeting in festival. She regards lyricism, nature, and poetic inspiration as most important. For a long while she has worked in Busan far away from the main stream of new art movement developed in the central painting circles. Jeon Jun-Ja is to break off the abstract art movement but in that point, paradoxically, she holds a very important position in the modern art history of Korea.

2008

‌개인전  Solo Exhibition /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전승보  Jun Seung-Bo

큐레이터, 미술비평 | Curator, Art Critic  

전준자의 ‘축제’에 가려면                                                           전승보


30여년을 넘게 이어오는 전준자의 < 축제 > 연작들은 회화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회화’라는 화두와 관련해 근년에 필자의 인상에 남는 에피소드가 둘 있다. 하나는 오랜만에 만난 어떤 지인이 문득 “요즘 미술대학생들의 그림이 죄다 일러스트 같아요.”라며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고, 둘째는 그 이야기를 다른 작가에게 했더니 “요즘 회화가 일러스트와 아닌 것의 구분이 필요할까요?”라는 반문을 외려 들은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자의 언급에 대해 일정정도 동의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념적인 미술언어와 뉴미디어의 발전과 확산이라는 새로운 세대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광대한 신천지가 펼쳐져 있는 현대미술의 실험적 영역에서 회화가 차지하는 영역은 축소되다 못해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을 때가 많다. 이런 현상은 요즈음 비엔날레 전시장을 생각해보면 쉽게 체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회화의 복권(rehabilitation)’이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필자에게 회화를 재발견한다는 것은 형식적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보다는 회화가 지닌 그것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을 의미한다. 익숙한 것에 가려졌던 것을 느닷없이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회화의 중력
회화는 회화만의 고유한 맛이 있다. 회화를 통한 인식은 가능한 모든 것이 시각을 통해 경험하게 하고, 무엇보다 그것은 손이라는 육체의 흔적을 통해 정서적 체험을 가지며 보다 강렬해 질 수 있다. 전준자의 붓질은 회화 고유의 맛을 담아내는 육체의 성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회화성에 관한 실험은 벌써 오래전 '인생의 근원적 질문과 함께 동행한다.'고 밝힌바 있다. 작가에게 회화 고유의 서정성은 회화의 깊이에 필수적으로 작용하며 마치 과슈화처럼 천천히 번져가는 농담으로 드러나고 있다. 작가에게는 색채나 구성과 같은 형식적인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존재하는 것 같다. 마티스는 "색은 단순할수록 내면의 감정에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전준자에게는 회화는 내면의 감정을 건드리는 하나의 메신저로 살아있다. 스스로 축제 시리즈에 관해 “인간의 문제와 그들이 모여 사는 삶의 형식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설정했다는 신호”라고 말한다. 다시 회화에서 고유한 것들로 돌아가자. 전준자의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즉흥적인 펜티멘토(Pentimento)는 놀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가운데 작용하는 심미적 원심력과 구심력의 결과이다. 이것이 어쩌면 작가에게서 나타나는 회화의 중력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흔적들이 아닐까. 작가가 오랜 시간 말해온 ‘만남’과 ‘축제’의 그 오래된 이야기는 마치 예술노동자가 주름진 손과 어깨로 격렬하게 구축해가는 시적 울림으로 다가온다. 균형있는 질서가 흐트러지고 데생과 색채의 융합을 의도한, 작가의 축제에 등장하는 익명의 인물군상들은 '무명의 평등'을 발견한다. 그것은 축제에 등장하는 만남의 전제 조건들일 것이다.


축제, 오래된 초대장
작가는 "만남과 축제는 우리가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궁극점"이라고 말한다. 축제 자체가 지니는 매력은 긍정적인 만남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열림의 장을 만든다. 이러한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이다. 사람에 대한 소외는 작가에게 가슴 아픈 현실이다. 만남에서 이런 소외는 개인 간의 문제이기보다는 집단 심리적인 측면이 크게 작용한다. 집단의 익명성은 결국 개인의 소외를 낳기 때문이다. 익명 뒤로 숨은 만남은 축제를 통해 오히려 개인을 파괴하는 부작용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혼인이라는 축제를 인간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만남이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배경의 두 남녀가 만나 공동체로 살아가겠다는 서약의 축제를 축제 중의 축제, 즉 축제의 결정판이라고 본 것이다. 이질적인 삶을 살아온 두 공동체, 두 사람은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합이라는 축제를 펼친다. 작가는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질서와 순서가 있기 마련"이라고 한다. "작품 속에 상생을 통해 영원성을 희구하는 인간 공유의 정신을 그리려 한다.”는 전준자의 축제에 참석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상대방보다 낮아져야만 동참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오랜 바람일 것이다. 이 오래된 초대장에 우리는 어떤 응답을 보내야 할까?

If Invited to Jun Joon-Ja’s Festival                                             Jun Seung-Bo


Jun,Joon-Ja’s Festival series that she has done for more than 30 years makes us think about painting.
I remember two episodes concerning painting that I recently heard from my acquaintances. One of my friends who I haven’t seen for a long time expressed his regret, alluding to the fact that “All paintings done recently by art college students look like illustrations.” As I told this story to other artist, he asked again, “Is it necessary to distinguish painting from illustration?” I think the two are all right. We may agree with the former statement to some extent.
In the vast new world of contemporary art that stimulates the new generation through conceptual artistic language and new media, painting’s sphere has been gradually diminished and even its presence is not well perceived. We are able to easily feel this phenomenon at a Biennale venue. To rediscover painting, or to attain the rehabilitation of painting, departs from any pursuit of the new in form. Rather, it means that we have to carefully listen to what painting is saying. It is a good luck to find out something covered by the familiar.

Gravity in Painting
Painting has its own peculiar flavor. In painting, we experience everything through the sense of sight. And, this experience can be reinforced by the traces of the hands. Through her physical sincerity, Jun represents painting’s indigenous flavor. Jun makes clear that her experiment with pictorial quality was for lasting with a series of fundamental questions on life. For the artist, a painting’s lyric quality is dedicated to the depth of painting whose light and shade gradually spread like a gouache painting. Jun seems to regard the fundamental elements of painting such as color and form as something secondary. The simpler the color is, the stronger it works on inner feelings, Matisse said. For Jun, painting is like a messenger conveying her inner emotions. Jun explains that her Festival series shows new perspectives on human issues and their life forms.
Jun’s work’s impromptu pentimento is an outgrowth of the centrifugal and centripetal forces operating among playing people. This pentimento is perhaps found in the peculiar marks derived from her painting’s gravity. She seems to bring about a poetic resonance through her rough hands
and vehement actions. The artist intends to produce a synthesis of sketches and colors, breaking out of a balanced order. A nameless equality is found in a group of anonymous people who appear in her Festival series.
It is a precondition for an encounter at a festival.


Festivals, a Letter of Invitation
The artist alludes that an encounter or a festival is the ultimate goal we have to pursue in life. The magnetism of a festival is found in the possibility for a positive encounter. It brings about an open space for a meeting. It is an unhappy thing not to be invited to the festival. For the artist, this alienation is a heart-breaking reality. It is not the matter of the individual, but a group of people in terms of psychology. That is why the group’s anonymity can bring about an individual’s alienation.
Jun considers marriage the most meaningful encounter of people in human history. In a marriage, man and woman with different backgrounds make a pledge to live in a community. It is the last word of all festivals. The two persons who have lived different lives take part in a festival in harmony. “A festival has its own order.” the artist said. “I intend to represent the human spirit to live and share in accord, pursuing eternity.” she added. Only when we lower ourselves, we can be
invited to Jun’s festivals. It is perhaps Jun’s long-held wish. Which responds we have to send to this old invitation?

유재길  Yoo Jae-Gil

미술비평, 전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Art  Critic 

삶과 영혼의 ‘축제’를 꿈꾸는 화가                                                                     유재길


-내가 축제라는 주제에 매료된 것은 ‘축제’는 하나의 이벤트가 아닌 우리 인생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자 우리가 통과하고 싶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전준자) -

  전준자의 작품세계에서 < 축제 >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의 축제는 작품 제목 이전에 삶과 영혼이 함께 어우러지는 기쁨의 주제로 절대자의 찬미로 이어진다. 미의 구도자로 그는 ‘축제’를 통한 조형 언어 추구와 삶의 기쁨, 그리고 삶의 치유를 꿈꾼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 축제 > 작업은 추상표현으로 삶의 본질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근작에 이르러 드로잉에 의한 인물 형상의 표현 등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진행된다. 특히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 물만골의 축제(2008) >는 도시 지하철 벽화로 만들어지면서 공간의 확장과 축제의 재현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담아나가고 있다.
  근래 완성된 < 물만골의 축제 >는 ‘축제’ 시리즈의 대미를 이루는 작품이다. 이것은 길이 8미터 대작으로 부산 물만골 지하철역의 벽화를 제작하기 위한 원작이다. 그 동안 제작되었던 < 축제 > 시리즈의 연장으로 이 작품은 추상과 구상적 인물 형상의 혼합으로 평면적 공간구성에 명확한 드로잉 선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등장인물은 모두 17명으로 수평 화면에 나란히 배치되어 병렬구도이다. 화면 가득한 군상은 무희처럼 유연한 곡선으로 그려지며 기쁨을 드러내는 자태를 뽐내며, 황금빛 모래사장은 청색의 하늘과 바다에 대비되어 대지처럼 배경 하단부에 위치한다. 이를 밟고 춤추며 행진하는 인물형상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축제의 참가자들은 가볍게 움직인다. 그들은 감상자를 축제의 현장으로 이끌며 체험을 유도한다.
  축제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익명으로 나타난다. 남녀의 구분조차 모호한 인물 형상은 사실성과 거리가 먼 형태의 왜곡과 생략, 단순하기 그지없다. 순간적이며 빠른 시간에 그려지는 드로잉으로 그의 < 축제 >에 나타나는 인물은 추상적이고 익명적이다. 그러나 누군지 알아 볼 수는 없으나 우리시대를 증언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현대인간을 대표하는 듯하다. 즉흥적으로 그려지는 형상의 익명성은 비록 모호하나 결코 은폐가 아닌 인간적 내면을 강조하기 위한 드로잉이다. 특히 삶과 영혼의 축제를 꿈꾸는 그의 작품에서 익명의 군상은 진실의 자아를 드러내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표상이다.
  익명적 인간으로 < 축제 >의 군중은 드로잉 선으로 그려지며, 이는 리얼리티와 거리가 먼 듯하다. 일반적으로 축제 이미지는 화려하며 사실적 묘사로 구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전준자의 < 축제 >는 시각적 화려함보다 추상적 인간 형상을 통해 주제의식을 강조하게 된다. 근작으로 오면서 주제의식은 인간 형상을 구체화시켜 돋보이게 하고, 더 나아가 내면의 은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근작의 군상은 가벼운 드로잉 선으로 사실적 인물 형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기서 역시, 리얼리티는 사진과 같은 묘사가 아니라 환희와 욕망의 기쁨을 표현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의미를 갖는다.
  축제의 현장에서 리얼리티의 인간 형상은 연체동물처럼 물 흐르듯 유연한 움직임을 갖는다. 즉흥과 순간적 느낌의 행위성이 잘 나타나는 드로잉 선으로 형상이 만들어진다. 이는 직관적 감각에 의해 구축되는 선들의 축제처럼 보인다. 드로잉 선의 강조는 이성적 구조가 아닌 감성적 구조를 바탕으로 지극히 개인적 감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표현이다.
  이처럼 < 축제 > 연작에 나타난 드로잉-소묘의 선은 명쾌하며 발랄한 젊음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때로 무질서한 듯 보이는 드로잉 선은 자동기술법처럼 매우 자유롭게 그려진다. 작가는 자신의 드로잉은 “통일된 것에서 벗어나며, 무엇이든 구속받지 않는 순수하고 자유로움, 편안함”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편안함과 자유로움으로 인체의 역동적 형상을 그리는 그의 < 축제 >에서 드로잉은 이론이 아닌 실천적 행위, 그 자체로 오랜 기간 노력의 결과이며 직관적 감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원초적 표현이다.
  원초적 표현으로 그의 드로잉은 초기 < 축제 > 연작부터 주목받아 왔다. 1970년대 후반 앵포르멜 추상양식에서 인간 형상은 알아보기 힘든 파괴된 선으로 나타난다. 단색조의 색채와 두터운 마티에르 속에 짧고 굵은 선들이 인물의 부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단절되고 분리된 인물 드로잉은 사물이 외형보다 내면이 갖고 있는 힘이나 환희의 결정체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구체적 형상보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바탕으로 원초성과 직관의 힘으로 순수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전준자의 < 축제 > 시리즈에 나타난 드로잉은 인물 형상의 리얼리티에 변화를 주며, 축제의 주제를 선명하게 만들어 나간다. 즉, 축제라는 주제를 추상의 모호성보다 사실적 인물 형상을 통해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축제는 고립보다 대화와 몸짓으로 공통된 삶의 기쁨을 느끼며, 춤추며, 노래하는 흥분의 장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통합과 교감의 순간들을 생각하며 절대 권능에 대한 찬미를 지속하고자 한다. 축제의 순수와 열정으로 관객을 초대하여 빠져들게 하는 현장으로 작가는 감상자를 초대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축제의 의미를 “만남에서 시작하여 만남으로 끝나는 만남의 연속”이라고도 설명한다. 신앙심이 깊은 그의 삶은 의미 있는 축제의 연속이며, 만남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축제를 통해 그는 에덴동산을 꿈꾸며, 더 나아가 인류가 하나가 되는 현대 스포츠의 제전을 축제로 생각하기도 한다. 축제의 다양한 주제의식과 표현으로 그의 드로잉은 폭넓게 전개되어 왔다.
  오랜 동안 < 축제 >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작가는 삶의 환희와 희망을 그려왔다. 2008년 완성된 대작 < 물만골 축제 >에서 보듯 현실과 환상적 분위기의 축제가 결합되면서 원초적 표현으로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 나아가 드로잉을 통한 리얼리티의 재현으로 그의 회화는 단순과 질서, 움직임의 역동성으로 깊이를 더해나간다. 드로잉 선은 공간을 자유롭게 노닐듯 흐름을 가지며, 차가운 청색과 따듯한 황금색의 대비 등 감성적 색채와 같이 축제라는 기쁨의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변화는 근작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이처럼 전준자의 ‘축제’는 인간의 원초적 표현이 강조된 새로운 조형적 질서의 작업으로 상처 난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An Artist Who Dreams the 'Festival' of Life and Soul                                Yoo Jae-Gil


 "The reason why I was charmed with the theme 'festival' is that festival is not an event but the goal we must pursue and the process we would like to pass through." (Jun Joon-Ja)

  The meaning of ‘festival' in Jeon Jun-Ja's works is very significant. The theme in her series of festival works is the joy harmonized with life and soul, which is connected to the praise of God Almighty. As a seeker after esthetic truth, she pursues the joy of life and the cure of soul through the formative language of 'festival'. Since the late 1970's, her festival series have pursued the true nature of life through abstract expression and finally have been developed diversely through the drawing expression of human shapes. Particularly, the work 'the Festival of Mulmangol(2008)' sent to this private exhibition has new meanings: the extension of space and the reproduction of festival.
  The work lately completed, 'the Festival of Mulmangol', achieves the denouement of her 'festival' series. This large work 8 meters long is the original one to make the mural painting of Mulmangol subway station in Pusan. This work, an extension of her 'festival' series, which constitutes the mixture of abstract and concrete human shapes, raises the complete level of artwork. All the 17 characters in this work are arranged in a row on the horizontal canvas. A group of people who fill canvas are described with supple curves and are proud of joyful figures. The golden sandy beach takes its place in lower position of the scene as if it were the ground contrasted with the blue sky and sea. Human shapes dancing and parading on the sands are brought into a close-up. The participants in the festival are moved lightly like birds flying in the sky. They lead the viewers to the scene experience of festival.
  The characters in the festival mostly show themselves anonymously. The human shapes, having obscure distinction between the sexes and being far from the facts, are much distorted, abbreviated and simplified. The characters drawn quickly and instantly in her 'festival' are abstract and anonymous. Though they are hardly recognized, they might be representative of our contemporaries. Though figures drawn extempore are obscure, they are drawings not to suppress but to reveal human inside. Especially, the anonymous crowd in her works desiring the festival of life and soul, revealing the truth of self, are symbolic of our generation.
  The anonymous people in her festival, being described with drawing lines, seem to be far from realities. Generally speaking, the image of festival is gorgeous and is emphasized with concrete and realistic description. But Jeon Jun-Ja emphasizes the theme of 'festival' through abstract figures rather than splendid concreteness. In her latest works, she has tried to give concrete shapes to her characters to set off to advantage and furthermore to escape from the concealment of human inside. Above all, the people in her latest works show themselves as realistic figures in light drawing lines. However, her reality has symbolic meaning not to make photographic description but to express the joy of jubilation and desire.
  In the scene of festival, human figures with reality have pliable movements like mollusks. Her shapes are made with drawing lines which well reveal the action of impromptu and momentary feeling. This looks like festival of the lines constructed by intuition. The emphasis on drawing lines is the expression made by extremely private sensation based on emotional structure, not on rational structure.
Like this, rough drawing lines expressed in 'festival' series make us feel lucid and lively atmosphere of youth. Her drawing lines which sometimes appear disordered are freely drawn with automatic description method. This artist says that her drawings aim at escape from every uniformity and restraint. The drawing in her 'festival' where she draws dynamic human figures with ease and freedom is not theoretical but practical action and the result of her efforts. That is the essential expression based on her intuition.
  Her drawings as the original expression have attracted attention since her first 'festival' work. In the late 1970's informel style, her human shapes are expressed in indistinguishable and broken lines. Her short and thick lines in a single color and deep matière symbolically indicate the parts of human body. The extinct separated drawing of human shapes intends things as crystallization of internal power or ecstasy. Because this artist has pursued pure and formative beauty with originality and intuition based on her inner world rather than her concrete outer world.
  Since the 2000s, the drawings in Jeon Jun-Ja's 'festival' series have changed the reality of human figure and have made the theme of festival clear. That is, her drawings embody the festival theme in realistic human shapes rather than in abstract shapes. The festival is the open field of excitement where we dance, sing and feel the joy of common life with conversations and gestures. This makes us think the moments of integration and mutual sympathy and continue the praise of the Almighty. This artist intends to invite viewers to the field of festival whose purity and passion make them immersed in the field.
  Of all things, she explains that the meaning of festival is "a series of meetings in succession." Her pious life comprises a series of significant festivals and meetings. She longs for the Garden of Eden and furthermore she regards modern sports festivals as the model of festival. The reason is that sports festivals make people unite together. Her drawings have widely evolved with various theme and expression.
  For a long time, she has pictured the jubilation and hope of life by making her 'festival' series. As you see in her great work completed in 2008, 'the Festival of Mulmangol', her essential expression shows the joy of festival in the mixed atmosphere of reality and fantasy. Moreover, her paintings become more deep by embodying reality through drawing with simplicity, order, and vitality. Her pliable drawing lines play freely in the space and extend the festival space of joy in the emotional colors by the contrast between cold blue color and warm golden color. In her latest works, we can easily recognize the change from closed space to open space. I firmly believe that Jeon Jun-Ja's 'festival' will cure our injured contemporaries by seeking new formative order that emphasize the essential expression of human beings.

전준자  Jun Joon-Ja

화가, 부산대학교 예술학과 명예교수|Artist

축제-만남의 축제                                                                                               전준자


만남의 축제
나는 작품을 임하면서 이 제목의 주제에 벌써 몇 십 년째 매달리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축제이다. 이 두 가지는 사실상 하나의 주제에 대한 변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만남과 축제, 이 둘은 인생의 근원적인 물음으로 어쩌면 아무도 그에 대한 답변을 한마디로 할 수 없는 까닭에 한갓 물음으로 끝나는 우리의 영원한 숙제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주제는 늘 새로운 상황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부각되는 까닭에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주제로 작품에 매진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Ⅰ. 만남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만남으로 시작해서 만남으로 끝나는 만남의 연속이다. 한 개인의 역사는 만남들로 점철되어있어서 만남들의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남을 여하히 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행불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만남은 어떤 의미에서 다시 만남이고, 모든 인식은 어떤 의미에서 다시 인식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알아본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보았거나 알았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만남을 종교에서는 인연 또는 예정이라고 하여 시간을 초월한 몇 겁의 인연 또는 섭리에 의한 기적의 사건으로 모든 존재는 애초부터 이생과 기적적으로 조우하고 있다.

Ⅱ. 만남에서 축제로
우리는 무엇을 생전 처음 보거나 맛보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며 게다가 그 첫 만남이 멋지다면 그 충격은 무어라 형언키 힘들 정도이어서 그 순간 감격과 감탄이 어떤 외마디 또는 몸짓으로 저절로 터져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예술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남의 희열인 축제는 본디 예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만남에서 대화가 싹트고 또다시 만남을 기약하게 되고 그 기다리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축제가 발생하며 이 축제를 통해 평화가 깃든다. 그러나 만약 어떤 만남이 후회스럽고 그러한 만남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거나 또는 만나면 괴롭고 다툼이 싹틀 때 전쟁이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축제와 전쟁은 대칭 되는 두 개의 극단인 동시에 이 두 관계 항은 양극단으로 서로를 잘 비추고 있다. 만남의 양극단인 전쟁과 축제는 평소의 갈등을 풀어내는 방식의 차이에 불과할 뿐일 정도로 아주 유사한 쌍둥이이다. 전쟁은 갈등과 반목을 외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강제로 합일하는 방식이라면, 축제는 처음부터 갈등과 반목을 내적인 것으로 인수하여 속에서 우러나오는 합일의 방식을 취한다. 강제와 자의라는 이 양극단은 따라서 우리가 전쟁을 필사적으로 피해야할 어떤 것이라면 축제는 우리가 필사적으로 추구해야할 그 어떤 것임을 역으로 반증한다.

Ⅲ. 축제
축제가 이렇듯 인간 존재에 근원적인 것이기에 모든 민족에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해왔고 그것이 문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 축제의 제전을 통하여 정확히 말하면 모든 사람이 그 축제의 제전에 동참함으로써 그 축제는 어떤 전체성의 모습을 띄게 되고 개개인은 전체 구조를 이루는 부분으로서의 소속감을 가지게 된다. 그때 그 축제는 그 자체로 곧 그 집단 특유의 개성과 변별성이 되어 그 집단의 정체성이 된다. 각 개인은 자신이 어떤 축제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소속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제야말로 어떤 행사나 이벤트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현주소이자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축제란 그저 하나의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할 목표이자 우리가 내내 통과하고 싶은 과정이기도 하고 우리의 잃어버린 낙원이자 우리가 종래 거기서 안식을 취해야할 낙원 자체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렇듯 만남의 꽃이요 폭발인 축제는 만남 자체를 가장 극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만나는 당사자 각각에게 활력과 의미를 주어 존재감으로 충만하게 한다. 축제는 삶의 최대한 확장이자 절정의 순간이요, 삶을 삶 되게 해주는 원동력인 것이다.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고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존재야말로 축제를 소유하고 축제에 젖어들 수 있어 삶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다. 이때 한바탕 기쁨뿐만 아니라 한바탕 슬픔까지도 같이 어우러질 때 그것이야말로 축제 그 자체인 것이다.
한편 불행이란 그런 의미에서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설령 축제에 참석했어도 축제를 즐길 수 없다면 그 당사자 본인의 마음이 괴롭거나 여유가 없어서 즉 그의 마음이 지옥과 같아 바깥 천국을 맛볼 수 없다면 그는 그저 축제의 소외자일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소외자가 된다. 축제에서의 소외는 최소한도의 삶으로의 위축이며 삶과 극명히 대조되는 죽음에로의 찌그러들기이다.
이렇듯 소외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관계 용어이다. 우리는 축제의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축제에 몸을 내던져 같이 어우러져야만 한다. 그러할 때 그 축제는 나의 바깥, 나의 외면이 아닌 나의 내면에 침투해 들어와 남의 축제가 아니라 내 속까지 흠뻑 젖는 나의 축제가 된다.
우리의 희망이며 우리의 삶의 정체성 자체인 이 축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축제는 그것이 축제가 되기 위한 그 자체의 질서와 순서가 있기 마련이다. 언뜻 보기에는 난장판인 듯이 보이는 축제의 어지러운 무질서는 오히려 그 이전에 거대한 침묵으로 있었던 질서의 반증으로 무질서의 폭과 깊이는 이미 선행 질서가 허용하는 크기만큼 비례한다. 많이 넣은 큰 그릇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쏟아 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재회의 축제일 경우 재회 이전에 만남이 인연으로 우선 있었을 것이요, 그 다음에는 다시 만나고자하는 애증이 갈증처럼 배여 있어야하고 그 다음은 일방 또는 쌍방의 다양하고도 집요한 시도들이 갈증의 표현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이 모든 순서는 마치 만물이 농염이 제대로 무르익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일정한 숙성의 과정과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Festivals-Festivals for Encountering                                                Jun Joon-Ja


Festivals for Encountering
I have explored the theme Festivals for Encountering for several decades.
It refers to two main elements: one being a festival, the other, encountering. These are mutually linked as variations of one subject. As two fundamental problems within life that nobody can probably answer, our assignment here may be a perpetual search for good. This theme looms as a new appearance within a new situation. It is why I have engaged it for so long.

1. Encountering
Our lives begin from encountering and end with encountering. A personal history is composed of many meetings, so we can define it as the traces of meetings. Happiness and unhappiness in life are thus dependent on such meetings. Every encountering is in a sense meeting something again, or perceiving something again, because the fact we recognize something means we have seen or known it before. In religion, encountering is a connection, or a prearrangement, and regarded as a miraculous incident of providence. In the beginning, all beings encounter life miraculously.


2. From an Encountering to a Festival
Our first experience of something new, namely, what we sense for the first time in our lives, is indescribable, and so impressive, a word or gesture of admiration comes to us spontaneously. As such, a festival, producing rapture caused by meetings, is artistic in nature. An encountering brings about conversation, and a new encountering gets proposed. If an encountering is made, a festival takes place, and peace dwells throughout the festival. However, if the encountering is painful, disagreeable, troublesome, even repentant, it causes war.
In this sense, festival and war are two contrasting extremes, reflecting each other. They are twins that are different in their ways to solve conflicts. While war is a way of increasing conflict and antagonism by considering them something external, a festival is a way of reducing them by considering them something internal. Therefore, war is something we desperately avoid, while a festival is something we have to pursue to the utmost.


3. Festivals
As a festival is fundamental for all humans, it exists in diverse forms for all nations and is a critical part of each culture. Through a festival that
is, by joining in a festival,a totality is formed as each individual belongs as a part within the whole. The festival demonstrates a group’s identity,
indicating its character and distinctions, while each individual recovers it’s affiliations and identity, according to the festival it belongs to. A festival is thus not merely an occasion or an event but the present position, or the status, of a human being.
This is a goal we must pursue through our lives, a process we have to undergo, or be a paradise we might lose when seeking repose or solace. The feast in a festival makes an encountering dramatic, simultaneously offering each individual vitality and meaning, thereby giving it full existence. A festival is a maximum extension of life, a climax within life, the motivational power within life. If one is able to share delights and sorrows with others, he or she has the capability to enjoy and possess a festival.
If we cannot partake in this festival, we feel unhappy. Despite our participation in the festival, if we cannot enjoy it since our mind is in distress or has no leeway, we remain alienated not only in this festival but also in our lives. We have to be very careful not to be alienated or not to be an onlooker in the festival. We have to be in accord with others in this festival. Only in this case, we are part of the festival. The festival, our hope as well as our life’s identity, is not made in a day. A festival has its own order. At the first blush, some festival seems to be in disorder, but it is evidence for previous order. The depth and width of disorder are in proportion to the size of preceding order. If a festival is for reunion, there must be a meeting before this reunion. Desire to meet again and diverse and persistent attempts have to appear as a manifestation of thirst.

1997

개인전  Solo Exhibition /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송만용  ‌Song Man-Yong

‌미학,  동서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Aesthetics 

축제속의 인간, 인간 속의 찬미                                                                           송만용



  흔히들 우리는 예술작품을 세상보기에 비유한다. 또한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진술들은 의도의 명확성은 있지만 그 방법론에서는 함구하고 있다. 즉 예술작품이 세상보기인데 어떤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또는 그 시대의 아들로서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그저 작가의 역량에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역설적 표현이 오히려 예술작품을 하나의 열린 공간으로서 존재하게 하고 작가는 각자 나름의 세상보기를 추구할 수 있게 하여 표현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름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보면, 현대미술은 그 < 다름이라는 차이의 역사 >로 보아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다름의 시각이 어떻게 세상보기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보편적 인식은 공동체 의식의 분모의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I. Kant의 반성적 판단력을 들지 않더라도 한 작가의 진지한 세상보기의 태도는 우리의 의식으로 감염되어 오는 것이다. 즉 “참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올바른 수단”으로서 예술의 세계는 존재하며, 그 진지함이 더할수록 그 인상은 커져만 가는 것이다.  사실 조형적 모티프로서 < 祝祭 >의 표현은 인간 문명적 성격이라기 보다는 自然愛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것은 최초 인간문명으로서 축제가 생겨난 것은 자연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大自然의 풍부한 생산력에 감사하고 또한 언제나 이런 풍요가 우리와 같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공동체적 양식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무형적 자연의 모습에서 인간은 인간을 위하는 자연, 즉 人格神을 그 경배의 자리로 모시게 되었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자연이 생산물이 창조주의 권능에 의해 생겨났다는 의식으로 전환이며, 나약한 풍성의 인간이 변화무쌍한 자연의 힘에서 굳건히 지켜 나아갈 의지의 힘을 가지게 됨을 말하기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중심주의 사회였던 그리스 사회에서도 여성들에게도 디오니소스 신을 추앙하는 축제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자연 인간들은 神에게 경배들임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적 갈등을 해소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축제의 목적을 가능케 하였던 것은 다름아니라 그 축제에 행하여진 여러 가지 행사들에 기인한 것으로 오늘날 공연예술을 비롯한 예술의 기원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 축제 >라는 주제로서 변함없이 그 의미성을 추구하는 전준자씨를 만날 수 있다. 우선 작품화면 전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녹색과 청색의 세계이다. 이것은 마치 숲속을 연상시키고 있는데, 그것도 빛으로 형상화된 축복이 가득한 숲속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최소한의 선적인 형상으로서 인간이 모여있는 모습은 그 자연에 대한 순응하는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작가 스스로는 “축제는 하늘이 내린 은총에 감사하며, 인간의 노력에 자찬하고 다음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범시민적, 범국민적이거나 범세계적인 큰 행사”로 정의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축제의 근본 의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천사가 노래하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고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기쁨과 평안을 노래하고 신과 인간이 합일체가 되는 상황, 그 순간을 축제라는 의식으로 부각시킴이며, 따라서 작가의 축제는 환락적 도가니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결국 이것은 작가 나름의 축제라는 성격에 대한 근원적 의미의 회귀추구로 보인다. 인간의 神에 대한 찬미로서 축제의 조형적 추구에서 작가에게서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는 표현은 선적인 인간들의 어우러짐이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을 이번 전시로 국한하여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다. 1) 각면 공간속의 인물 (82-83) 2) 청색과 녹색이 주된 표현속의 인물(88-91) 3) 흰색과 연두색이 주된 표현속의 인물(96-97) 4) 병렬적 인물(97-  ) 이상과 같은 분류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는 전체적인 모티브로서 축제의 의미는 변화하지 않으면서도 시대사적 얼굴에 따라 표현을 달리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1)과 2)의 분류에서는 공간의 설정에 맞추어진 것으로서 82-83년간의 작품에서는 인물의 등장이 적으면서 마치 큐비즘적인 공간분할이 그 특징을 보여 진다. 그후 차츰 인물의 수는 증가하였으며 공간의 설정도 리듬감을 찾아가고 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녹색이 차츰 많이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청색과 녹색의 공간에서 마치 빛의 부셔짐을 느끼게 하는 흰색의 공간이 등장이 보인다. 물론 작가의 변에서 보면, 찬미적 공간의 축제라면 의미에서 인간의 겸허함의  공간이랄 수 있는 이전시기의 표현에서 神의 영광을 표현하였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작품에서는 생명의 활기참이 느껴진다. 더욱이 작가 스스로가 얘기하는 애틀랜타 올림픽의 환희를 옮기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의 가장 큰 변화는 병렬적 인물의 구성이다. 이제 찬미로서의 축제에서 그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사실 축제는 찬미적 성격과 아울러 인간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행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축제의 성격을 ‘인간을 위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인간적 의미가 이제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것도 계층적 구성이 아닌 병립적 구성으로 차별이 없는 공동체의 이미를 표상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 평등의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얼굴을 살펴보면 다름이 존재한다. 즉 이전의 익명적 인간표현에서 우리민족의 12지신상의 얼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녹색의 공간은 점차 사라지고 청색의 공간이 병립적 인간상에 더욱 깊은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작가의 의식세계가 우리 민족적 정서로 선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이 된다. 

태초 에덴의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알게 된 부끄러움과 죽음의 공포에서 인간들은 자신을 정화하고 다시 에덴의 동산은 아니지만 지상을 제2의 낙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신에 대한 찬미를 축제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명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인간들은 다시 아담적 과오와 시지프의 만용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다. 즉 인간적 한계를 인식하고 공동체적 이익을 위하여 善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계 · 기술의 발전으로 생명연장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 인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자의적 발상에 기인한 것이기보다는 문명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인 것이다. 이 가식의 인간을 다시 한 번 神에게 찬미하는 인간으로 또한 유한한 인간생활에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은 오직 예술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을 인식하고 찬미로서 축제와 공동체적 염원으로서 병립적 인간상을 추구하는 전준자씨의 작품은 얼핏 보면 서양의 인간주체의 자아개념을 돌출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서양적 사고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적 기층민중의 염원이 배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새의 모습과 불상의 얼굴의 모습은 그의 작업에서 그러한 사고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준자씨의 작품은 색체의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종교화의 경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Human Beings in Festival, Admiration in Human Beings        Song Man-Yong


I
  Usually we compare ‘artworks’ to ‘the world seeing.’ And we call it ‘the son of the times.’  These have a definite intent but remain silent in the question of “how.” That is to say, for the questions - ‘artworks’ are ‘the world seeing’ but how we should see the world or the form of ‘artworks’ should be as ‘the son of the times’ - it places the questions under the capacity of artists. Such paradoxical expression allows artworks to be existed in an open space and vests the autonomy of expression and originality in the artists so that they are able to pursue ‘the world seeing’ according to the personal views. And we turn our attention to ‘the distinction in the diversity.’ Considering the extension of this idea, it may not be a serious error even if we regard contemporary art as < the history of distinction in the diversity. > If so, how can the artists’ views of variety obtain the universality of ‘the world seeing’? In fact universal perception should take the place of the denominator of the community’s sense. If not citing ‘reflective judgment’ of I. Kant, the sincere attitude of artist related to ‘the world seeing’ has an influence on our sense. Namely the art world as ‘the most right means for leading true life’ exists and the impression will be larger according to the depth of seriousness. In fact the expression of < Festival > as a formative motif is seemed as the expression of love for nature rather than human cultural character. This is because Festival as the first human culture has its origin in the thanksgiving to the Heaven as a community style of appreciating affluent productivity of Mother Nature and wishing for everlasting such abundance. After since, humans are to deify nature for human – ‘Personal God’ - from formless nature. This means that the mental switchover from nature to the Creator’s power as the subject of productivity and at the same time human with feeble-minded character has the power of will enabling to save its own skin from the shifts and changes of nature. For this reason, even the Greeks of the androcentric society allowed womankind to hold a festival for Dionysus. Through the festival, human is able to settle human discord as well as the worship of the Almighty. Furthermore to make the festival possible are the diverse events conducted in the festival, the clue of the origin of art including the performing arts of today.    
II 
  We can see, to some degree, JUN JOON JA who pursues the meanings continuously with the theme of < Festival. > Above all the world of green and blue color is filled up the entire surface of her work piece. This produces an impression of forest, which is the forest full of blessing giving shape to light. The scene of a large group of people described by the smallest lines gives us an impression of the compliance with nature. The artist says, “Festival is a big event including the citizens, the whole nation, or the whole world for appreciating the blessing of the Heaven, singing its own praises, and praying for abundance of the next year.” Also she stresses that the fundamental meaning of Festival is “giving glory to God and indicating the intent that the angels are singing.” This is for embossing that Festival is for singing the pleasure and peace and is the moment that human and God combine into one. Accordingly she indicates that her Festival is no match for merrymaking whirlpool.  After all this is seemed that the artist seeks after the original meanings of festival in her own way. As the glorification by human, the expression of festival that the artist is pursuing continuously in performing arts is the harmony of humans giving form to lines. In this her exhibition, her work pieces may be classified into as follows: 1) Character in the space of each side (82-83)2) Character appeared mainly blue and green color (88-91)3) Character appeared mainly white and yellowish green color (96-97)4) Character standing in a row (97- ) From the above classification, the artist applies different expression according to the character by times without changing the meanings of Festival as the key motif. That is to say, in the classification n of 1) and 2), its feature is a fixed setting of space. In the work pieces in 1982-1983, there are few characters and the space partition as if Cubism forms the main feature. After since, the number of character is increased gradually and the setting of space shows rhythmical sense. And green color occupies the space of canvas little by little. In the following the space of white giving the feeling of daggled by the bright light is appeared in the space of blue and green color. According to the artist’s explanation, in the sense of festival as the space for glorification, the former expression stressing the space of human humbleness shifts to the emphasis on the glory of God. Her recent work pieces give the energy of life. It may be natural considering her saying that she wishes to contain the gladness of Atlanta Olympic in her work piece.  Of all things, one of the biggest changes in this exhibition is the composition of the parallel characters. At last the subject comes on the stage in the festival as glorification. In fact Festival is an event pursuing the happiness of human community as well as the glorification. For this reason, the character of festival should be ‘for human.” Now the human meaning comes into view. Especially her festival represents the meaning of community without class distinction through the parallel composition, not hierarchical one. Her work piece is seemed to reflect the natural equality but ‘distinction’ exists in each character. That is to say, the face of twelve horary deities appears on her work piece from the former expression of anonymous character. At the same time, the space of green is disappeared gradually and the space of blue adds up the mystery of parallel human image. After all such expression means that the consciousness of the artist is turning toward our racial mood. 
III
  Human is to begin to seek for glorification via festival in order to purify itself from the shame and the fear of death recognized by eaten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in the beginning of the world and create the 2ndEdenontheEarth,thatisnottheGardenofEden.With the advance of civilization, however, human is to repeat the mistake of Adam and the daredevil courage of Sisyphus. Namely human does not live with practicing virtue in the recognition of the limitation inherent in human and for the community benefit but leads a life of wishing for life extension as a shameless and brazen-faced fellow according to the development of machinery and technology. Of course such change is not caused by human literal conception but is a virtual image created by civilized society. The work pieces of JUN JOON JA – who pursues the festival as glorification and the parallel human image as the dearest wish of community in the recognition that only the world of art is able to help the false human to be transformed to the existence of glorifying God once again and to pursue the immortality in a mortal life – may seem like just projecting the sense of self of Western anthropolatry, but it is comprehended that her work pieces are containing the racial popular heart's desire. Particularly the shape of bird and the Buddhist image act as a spokesman of the above thoughts in her work pieces. From this point of view, the work pieces of JUN JOON JA make us feel the piety of a holy picture out of visionary atmosphere caused by colors.

유준상  Ryu June-Sang

미술비평,  전 서울시립미술관장|Art Critic 

집합(集合)으로서의 군상(群像)                                                                        유준상


  지난 이십여년 간 전준자씨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기본 테마는 인간에 관한 문제였다. 그가 관심으로 하는 인간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사회적집합의 사람들이다. 즉 한 사람의 인간 곧 개별(個別)은 그가 관심으로 하는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다. 주지하듯이 인간의 존재이유를 유일무이한 개성(個性)에 의해서 판별하기 시작한 건 서양의 경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기연이 된다. 이로부터 개인주의 숭배의 역사관이 만연되기 시작하며, 인물화(人物畵)라는 새로운 장르가 미술가에 등장하기 시작했음은 주지하는 대로 이다. 여기서의 ‘인물’은 어디에나 있는 개별들이 아니라 사회적 위상으로서의 개별 또는 상징적인 권위를 뜻했던 것이었다.  


  전준자씨의 인간은 이러한 개별들은 아니다. 비유로서 말하면 무명(無名)의 평등(平等)이라고 할 수 있는 군상(群像)이 그가 관심으로 하는 인간들이다. 무리가 무리를 부르며 서로 어우러지는 집합의 구성(構成)이 그가 시도하고 있는 회화세계이다. 가령 모든 사람은 모두 차별 없이 이목구비와 신체를 공유하고 잇는데 각기의 용모와 몸매는 그러나 서로 구별된다. 구성(構成)이 다르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말하는 콤포지션은 이러한 형식의 발생적 원리를 하나의 전체상(全體像)으로 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전체는 독립된 요소(尿素)로 성립되지만, 요소는 체계(體系) 그 자체를 특징 지우는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어떠한 개인도 사회와 역사를 떠나서 존립할 수 없듯이, 한 인간의 특성(特性)과 구별되는 집합(集合)의 특징을 추구하는 요인으로서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고전적으로 비유하면 칸트가 말한 인간인식의 형식인 공간(空間)과 시간(時間)의 형식이라는 게 되겠다. 19세기의 낭만주의사상은 사회를 초월하는 순수고립의 환상적인 개인을 상정한바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은 상금에도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으면 유아독존의 자가당착을 부추기고 있다.

  전준자씨의 예술관은 이러한 환영(幻影)을 직시하고 이것을 부정하려는데서 유발되었던 것이다. 지난 이십년간의 경과가 그것이었다. 그의 구성은 인간집합의 전체상을 회화적인 변환체계(變換體系)의 특성을 살려 인체(人體)의 분절(分節)을 서로 어우러지게 하는 전체상이었다. 이러한 그의 근작은 정면의 군상들이 병열로 직립(直立)하는 드로우잉으로 새삼 시도되고 있다. 발생학적인 인식의 기본단계로부터 인간의 특성을 소급시킨다는 입장이다. 인간이 다른 생명과 구별되는 최심최오의 원리는 그 존립의 형식이 수직(垂直)의 생명체라는 데 있다. 수직의 특성은 지체(肢體)가운데의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과, 따라서 두뇌의 용적을 다른 생명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확대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두 다리로 굳건하게 그 지성(知性)을 받히고 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정면(正面)의 구상들의 하나 라나는 그러나 그 개별의 특성이 배제되고 있다. 표정이 없고 개성이 없다. 다만 그들이 정면(正面)의 수직이라는 공통분모가 그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 생명이라는 건가....?

A Group of People as a Gathering                                                  Ryu June-Sang


  The theme Jun, Joon Ja has consistently pursued for last 20 years is the problem of man. Man she is interested in is not a single person, but man within a social gathering. This means, a single person, each individual, is not of her concern. As is widely known, it was during the Italian Renaissance we began evaluating Being through individuality. Since then, a history of worshipping individualism has remained pervasive, and it helped form the genre figure painting, popular throughout art history. The figure within it means in dividual, as asocial status, or symbolic authority, not an individual who may exist anywhere. In other words, the pervasive renaissance figure is a leading figure, a representative of society, proving the objective of art of the renaissance was and remains to depict the figure as individual.


  Man in Jun’s art is not an individual figure. She is interested in the group; people metaphorically referred to as ‘nameless equality’. In her art world, Jun attempts to form gatherings with individuals. For instance, all her people have indistinguishable features, but their appearance and figure are distinguishable from one another. This is because of her use of composition. Her painting composition constructs a whole, by shaping each individual through a principle form. That is, a whole is composed of independent elements, while forms follow a principle that define the system.  As is widely known, just as no individual exists without being society or history, a group of people, as a congregation, has its distinct features that distinguish each of it individuals. According to the classical comparison offered by Immanuel Kant, this is a temporal, spatial way of perceiving a man.  Romanticism in the 19th century assumed the presence of isolated, illusory individuals who exist away from their society. These illusory images have enthralled many people, bringing about a self-contradictory tendency.  
  Jun Jun-ja’s view of art seems based on her rejection of these illusions. The images she created show painterly modifications of the body through which each body part appears congruous. Her recent drawings feature a group of people standing in a row. One of the features human beings are distinguished from other creatures is their upright posture which enables them to use their two hands freely and to enhance their intellectual capability strikingly. Her frontally presented appearance of each person, however, excludes each one’s individuality. Their upright poster indicates they are humans. If so, who are they? Where did they come and go?

전준자, 고요한 미의 세계                                               삐에르 브리쎄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한다. 전준자는 그의 조용하고 고요하고 아늑하고 시적인 그림을 파리의, 수십년 전부터 예술의 정기가 흐르고, 밤낮 카페나 술집, 유명하거나 작은 수많은 갤러리들이 몸을 맞대고 있으며, 세계가 창조되고 파괴되고 재창조되는 동시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그림, 조각 혹은 판화들이 어울려 부딪치고 경쟁하는 상제르맹데프레와 세느강 사이의 중심가에서 처음 선보인다. 하나의 세계, 그러나 완전한 세계! 협소하고 시끄럽고 활동적이고 정열적인 거리의 양쪽에서 가장 고전적이라 알려졌고 인정받고 유명하고 존경 받고 명예로운 예술, 혹은 일요일 관람객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가장 학술적인 예술들이 모여서 경쟁하는 우주, 한쪽에서는 유행을 따르기 때문에 “사기, 거짓, 욕설”이라고 소리치고 고함지르게 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벌리고 감상하게 하는 전위 혹은 탈 전위 예술. 매 철마다 운동, 학파, 주의, 유행들이 창조되고 파괴되는 세계, 유명도에 있어서도 아무것도 완전히 정복되지 않으며, 언제나 일시적인 성공이 내일을 보장할 수도 없고, 타르페이의 바위가 카피톨 옆에 머무르는 세계. 예술을 재발명하고 혁신하고 파리를 정복하려 결심하고 달려온, 모든 인종과 문화의 예술가들의 세계. 

  모든 것이 가볍고 수월한 것 같은 정확하지 못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고 영구한 실력을 가진 자에게만 시간,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정말로 주어지는 등대의 도시 파리, 함정의 도시 파리. 바로 여기서 왕왕거리는 벌집의 중앙에서, 전준자는 우리 수도에서의 일 년간의 노력과 거의 수련에 가까운 생활 끝에 전시회를 하기로 선택했다. 먼 그의 나라에서는 국립부산대의 강사이고 교수이며, 젊은데도 불구하고 명예와 학위들을 축적했지만, 그는 데뷰탕의 약간 약해보이는 겸손함과 수줍음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가져왔거나 대부분 파리 도착이후에 그려진 다양한 크기의 데상과 수채화, 종이나 캔버스를 사용한 유화들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파리 대학촌 브라질관의 (한국관이 아직 없기에)좁고 불편한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놀라운 그림! 놀라운 이유는 전준자가 저질의 사진을 통해서만 알았던 유럽 대가들의 작품을 방문에 방문을 거듭한 박물관에서 보고 그것을 존경하며, 우리의 가장 최근의 예술을 날마다 더 알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아시아나 다른 곳에서 온 수많은 예술가들과는 달리 서양의 조화되지 못한 유혹의 노래에 저항하였고, 우리 화가들의 용감한 상상과 더 큰 표현의 자유만을 수용한 듯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루오의 작품에 대한 정열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는 루오의 조그마한 영향도 찾을 수 없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발견한 루오의 작품은 “진실한 정신성”으로 그에게 깊이 와 닿았다. 반대로 서적을 통해 아주 좋아했던 샤갈의 작품은 실제로 보았을 때 너무나 친근하고 귀여운 시가 됨으로써 약간 실망을 주었다. 이제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이 여인은 마릉이 도와 수 천 년의 문화에 젖고 그것이 몸에 배어 있는 덕분에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의 문화가 그의 문화에 이식된다면 정신도 없고 영혼도 없는 만능의 예술, 혼합적 국제적이며 뿌리 없는 혼혈의 예술을 탄생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그의 그림 속에서 때로는 아주 가벼운 서양의 영향요소를 발견할 수 있지만, 우리와 같이 신비를 사랑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는 감동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부처 자비의 반영이라 할 수 있는 비현실에 가까운 조용한 분위기, 평화스러운 부드러움, 극적인 세련됨과 조화된 희미함을 언제나 구성과 데상과 색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네의 수련을 연상시키는 밤의 푸른색이 낮의 마지막 채색된 빛을 없애려 하고 있는 듯 한 커다란 황혼의 “풍경”앞에서 매력 있게 약하고 일시적인 지울 수 없는 영상과 같기 때문에 공상 속에서 나타난 것 같은 회색 푸른색 단색화의 85-86년도의 “여인들”앞에서, 혹은 소중한 단순함속에서 자연과 미에 경의를 표하는 듯 한 꽃의 “정물”앞에서... 여기에 있는 간신히 땅을 딛고 있는 듯 하기에 단어가 필요 없는 전준자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감상하고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

Jun Joon-Ja, Art of Silent Beauty                            Pierre Brisset


  They say Korea is the land of morning calm. The calm, silent, serene, evanescent and poetic painting of Jun Joon-ja shows us her work for the first time in Paris, between Saint-German-des-Pres and the banks of the Seine river, at the heart of the quearters where ever since many decades the sprit breathes, where day and night, in every café and in lesser bistros like in innumerable galleries of more prestigious and modest standing, the world is made, unmade and remade, where paintings, sculptures and prints of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come together, confronting and contesting one another. This is world, a real world, a universe where on both sides of narrow, noisy, rusting, passional and pattionate alleys one finds art that is more classic, known, recognized, consecrated, respected, honored or far more academic which would fret the desire of Sunday amateurs. Art said to be of avant-garde or trans-avant-grade, while claiming to be of the trend, creates the howling cries of “imposture, swindle, sacrilege” pitted against those pieces and at the same time enraptures others, who do not know anything, with admiration that is almost sanctimonious. This is the world where each season movements, schools and group are made and unmade and reputations too. This is the world where no reputation is ever definitely acquired or where the success, always fragile, cannot be assured of tomorrow. This is where the Tarpeian Rock remains close to Capitol.    Nevertheless, this is the worlds where artists of all races and all civilizations flock from all the points of the planet, well determined, in the main, to re-invent and revolutionize the art and to conquer Paris.

  Paris, a city of a lighthouse and a snare, despite of its deceiving appearance of fleetness and facility, only consents to reveal herself, after a lapse of time, much longer time, to those unique people who merit by their undeniable and durable talent. This is the very place, at an open center of the buzzing bees, where Jun Joon-ja, following a year of a laborious and almost ascetic stay in our capital, has chosen to exhibit her painting with somewhat febrile modesty and timidity as a debutante, through, in her faraway country, as lecturer and professor of the Art School of Pusan National University, she had accumulated, in spite of her youngness, titles, degrees and renown.It was at the Brazil House of the City University of Paris where she lives-because she was not able to live in a Korea House yet to be built-that we have met her in her uncomfortable and small atelier where in every corner and nook piled up were the dessins, water colors or oils done on canvas or paper in every size either brought from Korea or, in the most part in a great number, created ever since her arrival in France.    
  
  The painting was amazing. Amazing and surprising because despite of her admiration for the greater masters of Europe exhibited in our museums, without those visits and revisits and revisits, of whom she knew until then only by way of wicked reproductions and though she has been well familiarized each day further with our art of more recent days, Jun Joon-ja knew, unlike many foreign artists from Asia or from elsewhere, how to resist the discordant chant, which come quite often from Occidental sirens, so as to retain, perhaps, from our painting, only certain audacity of imagination, far greater liberty of expression. That was all. Even despite of her fascination with Rouault which she has never seen in Korea, we would find a small influence in her works. She had received a revelation of his work at the Paris Municipal Museum of Modern Art, a workwhich is profoundly marked by his character of authentic spirituality. Contrarily, as to Chagall to whom she was much attracted before in the reading of his books but when seen in reality, she was a little disappointed with a poesy which became too amiable and jolly to her eyes.No, by the grace of heaven this young lady has arrived today at the plenitude in her art and has been able, against and despite of all, to retain herself, impregnated with and bathing in millennial culture on which our proper culture cannot be transplanted without risking a birth of an art that is hybrid, cosmopolitan, deracinated, bastard, a passé partout art with no spirit or soul. Among all those canvases which unfold before our eyes, we may sometimes detect some very light trace of occidental influence and always in the composition, dessin and colors there is the climate of calm, that peaceable sweetness, the extreme refinement and the harmonious softness close to unreality which, for us who are rationalists captivated by winders, can be merely moving and incomprehensible as a reflection of the wisdom of Buddha.Here, in front of the large landscapes of twilight where the blue of the night, like certain water lilies of Monet, seems willing of efface the last glimmers colored of the day; in front of the women of the years of 85/86 which, like fantastic apparitions, become imponderable visions deliciously fragile and ephemeral, in their monocolor of gray, blue and vermilion; or, in front of those still life of flowers which, in their precious simplicity, offer a discrete homage to nature and to beauty here, in front of those works of Jun Joon-ja who dispenses with word in such a manner as she seems hardly to touch the earth, we have to only admire, meditate, and muse. And, we have to keep silence.

‌신항섭  Shin Hang-Seop

미술비평|Art Critic 

전준자의 작품 세계                                                                     신항섭


  그림 속에는 화가 자신의 몸짓이 스며든다. 그 몸짓은 격렬한 붓의 제스처로, 명확한 선묘로, 추상적인 이미지로 그리고 색채로 표현된다. 인간의 몸짓은 감정 표현의 수단이다. 몸짓이란 단순히 행위적인 표현 언어만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윽한 정감이 묻어나는 색채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전준자(全俊子)는 몸짓이 크지 않다. 형상과 색채를 절제함으로써 감정표현의 몸짓은 자연히 작을 수밖에 없다. 대신에 영민한 미적 감수성은 섬세한 표정을 지어낸다. 표정이 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감정의 밀도감은 높아진다. 

  그의  작품에 인용되는 인체의 이미지는 극히 간략한 형식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익명의 무개성한 인물로 통일되는 인체의 간결한 조형어법은 몸짓을 최대한 억제한다. 반복동의어와 같은 정형화된 이미지의 그 단조로움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단지 얼굴 부분만으로 인체의 전부를 연역케 하는 그 태연자약한 표현형식에서 금욕적인 작가의 몸짓을 감지하게 된다.   생각을 내부로 침전시키려는 그 엄격한 표현논리 위에서 그는 혼자만의 잔잔한 기쁨을 맛보려는 것일까. 색채에서도 감정의 환희는 감춰진다. 「축제」라는 제명에서 연상되는 화려한 감성의 향연을 시각적으로 변별해내기란 쉽지 않다. 청색조의 그 차가움과 엄격함, 회색조의 이지적인 표현성, 그리고 거기에 들어서는 검은 색 선의 명료한 자기표현성을 종합하여 느끼는 인상에서 청교도적인 절제 미학을 맛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겁고, 어두우며, 차가운 색채를 순화시키는, 명도의 차이에서 오는 빛의 이미지로 인해 화면은 문득 활기차게 깨어난다. 그 빛은 내부로부터 온다. 아주 조금 열린 감정 및 의식의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빛의 속삭임은 단색조의 이미지에 신비감을 부여한다.   빛은 밝음이고 기쁨이고 희망이다. 빛은 그러한 미적 감정을 묻혀서 나온다. 빛이 동반하는 미적 감정은 순수하고 투명하다. 굴절 없는 빛의 직진성에 응답하는 순수한 감정의 몸짓이 조그마한 표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빛은 이미지를 투과한다. 그래서 사실적 이미지는 생략되고 지워진다. 빛의 투과로 형체는 온전한 모습을 잃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남겨지는 볼품없는 인체의 형해(形骸)에 의해 그의 표현의지는 사실적 이미지를 포기하게 된다.  형체의 간결함은 서정적인 운문체로 처리된다. 축약되고, 은유되는 의미내용과 함께 명료한 사실적 형상은 감춰지는 것이다. 최소한의 함축적 이미지로 사실적 형체를 떠올릴 수 있는 시각적 연역법을 채택한다. 그의 조형어법은 시어(詩語)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숲속에서 또는 안개 속에서 차츰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 한 인체 군상은 완벽한 화음을 토한다. 침묵 속의 함성과 같은 커다란 울림을 내적 언어로 간직하는 군상에서 아름다운 질서를 볼 수 있다. 그 질서는 통일된 감정의 흐름이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결집된 사람들(인체)이 집단 감정을 이룰 때 고조되는 그 정연한 질서와 조화의 미를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다. 혼돈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의식의 창에 투영되는 질서와 조화는 내적 감동을 수반한다. 그의 작품은 그 같은 미적 감동을 간직한다.  수사적 표현은 시각적 쾌감을 줄지언정 정적이고 사색적인 깊이를 느끼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인체는 기호화된다. 사실적 이미지 추적이 가능한, 인체의 얼굴부분임을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적 이미지의 기호로 통일된다. 기호화된 인물, 그 군상에서 그만의 형식미를 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신비, 환희, 질서, 사색적 분위기 등 복합적 감정을 야기한다. 그리고 정숙, 단아, 강직, 진실 등의 정서도 읽혀진다.  

  최근에는 사실적 이미지가 더욱 부서지고 거의 독창적 표현에 근접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 자신의 사색과 관련이 있다. 이제 사실적 이미지에 대한 강박관념에서도 벗어나고픈 것일까. 정녕 그를 구속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추상적 이미지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사실적 이미지는 남아 있다. 인체임을 간신히 추측케 할 뿐인 기호적 이미지로 바뀌면서 화면은 균질 화되어 간다. 구체적인 인체 묘사가 없기에 시각적인 부담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감상자의 시각이 어느 특정 이미지에 매어 있을 필요도 없다.  

  마치  해초와 같은 이미지가 색채의 띠를 형성하면서 유기적인 표현구조를 만들어낸다. 색채로 나뉘는 이미지들 간의 합주는 화면의 평정을 돕는다. 색채에 의한 이미지들 간의 조화와 작용을 통해 화면은 생동감올 발산한다. 아득한 곳 어디선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환영을 보듯이, 그의 그림은 우리의 미적 감홍을 내부로 끌어들인다. 몽상하는 어린이처럼 어떤 손짓에 의해 망연히 이끌려 들어가는 우리의 미적 감수성과 미의식은 무한한 평화를 느낀다.  그의  그림은 항시 열려있다. 구체적 이미지를 나타내는 선이 없기에 우리의 미의식은 작품의 내면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그림에 밝은 색 띠로 표현되는 빛은 의식의 투명성에 관여한다. 시각적인 쾌감을 상실한, 자기표현성이 억제된 균일한 화면을 꿰뚫는 그 의식의 명료함을 통해 표현의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는 진실을 본다. 그 진실은 신념이 키워낸 미적 가치인 것이다.  그의  담담한 표현 속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미세한 빛의 파장이란 다름 아닌 미적 진실이 외부로 보내는 메시지이다. 

   그는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미적 진실을 얻으려는 환상을 일찌감치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추상을 동경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그림은 당연히 표현대상이 있다. 「축제」에 참여하는 일치된 감정의 소유자들이 표현대상이다. 하늘·자연 등 절대적인 권능에 대한 감사와 순응을 약속하는 집단감정에 의한 존재감의 통일. 「축제」는 그 절대 권능에 대한 찬미이며, 예속의 기쁨이고, 그 확인의 절차이다. 그 순간의 감정의 빛남, 순수, 열정을 영속적인 이미지로 고착시키려는 그의 표현 언어는 그 같은 느낌의 충실한 전달을 위해 기능할 뿐이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 같은 이미지의 중첩에는 농축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시각적으로는 선명하지 않지만 그 미적가치를 의심할 수 없는 존재의 명료함을 우리의 의식 속에 침투시킨다. 감동을 표현적인 쾌감으로 바꾸는 일에 무심했던 그로서는 자연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릴 때에는 구체적인 형체를 그리지 않았다. 준비된 미적 감정으로 보았을 때 부딪쳐 오는 느낌을 간결한 필치로 가볍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감성적 표현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의 색채감각은 모든 자연색을 순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색채를 통해 받아들일 수 있는 안정과 위로, 잔잔한 기쁨을 그는 제한 없이 쏟아낸다.  늘 그만한 표정을 지어내는 그의 절제력은 평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화면의 충실도를 신뢰할 수 있는 그 밀도감에서 또한 그의 작가적인 사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그는 한 때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강직한 화면 구조에 심취했었다. 그 놀라운 폭발력은 그의 또 다른 면이다. 폭넓은 감정을 조율할 수 있는 의지력에서 그의 내재된 힘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그 힘을 차가운 의식으로 잠시 잠재우고 있었다. 그 힘은 다시 폭발할 것이다.  최근  작품은 색채가 부드러워졌다. 황색조의 밝은 이미지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실적인 이미지가 거의 사라진 상태의 한층 단순화된 표정을 지어낸다. 이와 함께 화면의 밀도감은 더욱 충실해지고 있다. 반복되는 작업의 습관적인 행위 속에서 형성되는 깊이와 밀도감이 견고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제는 단지 사유하고 조응함으로써 관조될 수 있는 세계로 가고 있다. 햇빛을 충분히 받음으로써 깊이 익어가는 열매의 그 단맛처럼 그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숙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The World of Jun Joon-Ja's Art                           Shin Hang-Seop

 
  In painting, the artist's gesticulation permeates into the tableau. The  gesticulation is expressed in the forceful brush strokes, articulate linear descriptions, abstract imagery and colors. Human gesticulation in an expressive mode of emotions. Gesticulation is displayed not necessarily as an expressive language  of behavior alone. It can be also fully communicated in colors imbued with secretive sensibilities. Gesticulation of an artists is thus variagated in technics of expressivity.  The gesticulation of Jun, Joon-ja is not exaggerated. As an expressive mode of emotions, it is naturally moderated with the control of the shape and color. In turn, her refined sensibilities find an outlet for delicate expression. The emotional density is rather heightened through moderation in expression.  
  Human images, quoted in her work, achieve a formalistic unity considerably simplified. A succinct plastic grammar for human figures, unified by anonymous, amorphous people, works to minimize the gesticulation. In a natural manner she accommodates the monotony of images, stereotyped like in tautology. In her audacious form of expression whereby the whole of human figures can be    deduced merely from the part of the face, her ascetic gesticulation can be detected.  Is she savoring the secret delight of her own by herself in that strict logic of expression for internal sedimentation of her thought?   Her emotional joy also remains shrouded in color. It is not easy to visually discern the colorful banquet of emotions as might be evoked from the title of the series, festivity. In the impression, gained from a synthesis of coldness and strictness in blue, the intellectual expressivity in gray and the distinct self-expressivity of colored lines in dark, one comes only to taste the estheticism of moderation.  

  However, by dint of the image of the light comes from the shading of brightness in purifying the sombre, dark and cold hues, the plane suddenly comes back to life. That light comes from within. The whispering light, leaking from a small fissure in emotions and consciousness, confers a sense of mysticism on the image of monotony.  Light goes through the image, simplifying and effacing the image, causing the figure to lose its shape. Then, her expressive will is rid of its realistic image by the human figures rendered shapeless as the remainder.   Simplicity of the shape is rendered in lyrical verses, concealing the definite, realistic image along with abridged meanings of metaphor, employing a visual deduction, inducing the realistic shape with the minimal, connotative image. Her plastic langage is characterized as poetic verses.  

  A group of human figures, as if slowly emerging either from the forest or from the fog, vibrate a perfect harmony. One may detect a beautiful order from the group that keeps the resounding roar of the shouting in silence as an internal language. That order is a flow of unified emotions.  One detects in her work the beauty of harmony and order that is pitched up when a group of people (human figures), assembled for a purpose, reach a state of collective emotion. The order and harmony, awakening slowly from chaos and being projected to the window of consciousness, arouses internal excitement in its wake. her work stirs such esthetic emotions. Rhetorical descriptions may induce visual delight but fall short in impressing the depth of silent musing. Thus, human figures are also coded as signs in her work. They are unified into signs of realistic images whereby the pursuit of images is possible, faintly discerning the part of the face. She produced the formalistic beauty of her own in the group of people that are coded as signs. They give rise to a complex of emotions-something mystical, ecstatic, beautiful in order, in an air of musing-in addition to such feelings of tidiness, neatness, straightforwardness, sincerity.  

  In the recent time, realistic images are further deformed, approaching almost to abstract expression. This change is related to the depth of her own thought. Is she now attempting to free herself from an obsession with realistic images? Indeed, there is nothing that constrains her.  Nevertheless, In spite of similarity to abstract images, realistic images are still there. Shifting into coded images barely allowing to let discern the trace of human figures, her plane is being homogenized. In an absence of figurative depiction of the part of human figures, the visual burden on the part of viewers is lessened to that extent. There is no need for the viewing angle of spectators to focus on any particular image.   

  Seaweed-like images constitute an organic expressive structure, forming the base for coloration. An ensemble, being played out among images divided into colors, contributes to the serenity of the plane. The plane emanates with a sense of liveliness by way of harmony and interaction among images arranged by color belts. As if looking at a certain illusion gradually emerging from somewhere far away, our esthetic emotion is drawn inside by her work. Our esthetic sensibility and consciousness comes to feel an infinite sense of peacefulness like a dreaming child who is beckoned into fantasy.  Her painting remains always open. In an absence of lines pointing to definite images, our esthetic consciousness is free to enter the internal world of her work. The light, expressed in color belts of such brightness, is related to the transparency of consciousness.  

  By way of that transparency of consciousness that press through the homogenized plane moderating self-expressivity to the loss of visual delight, we can see the verity at the furthest seat of expression. This verity is an esthetic value nourished by the conviction in faith.  The wavelength of the minute beam, constantly flowing in her serene expression, is nothing but the energy that is transmitted out by esthetic verity.  Early she has given up a void hope of attaining esthetic verity by means of definite images. This did not necessarily drive her to abstraction. Her work has an object of expression by necessity. The object of her expression is those who share the same emotion in the participation of festivity. The sense of being is unified by collective emotion, offering gratitude to the omnipotence of heaven, deities and nature with the pledge of obedience.  Festivity is the glorification of this omnipotence, an expression of delight in obedience and a process of this confirmation. Her expressive language, attempting to fixate brightness, purity and passion of the emotion of that moment, merely plays a role of faithful communication of such feelings.  

  Condensed beauty permeates through the layers of wave-like images of emotional rippling. With no visual narration, though, the clarity of existence, endowed, beyond doubt, with esthetic value, is instilled into our consciousness.  Indifferent to turning the aroused emotion into expressive delightfulness, she did not draw on definite shapes in her painting of natural landscapes. She merely depicted, lightly, with succinct brushwork, the feelings which came to her when she saw her objects with esthetic emotion prepared beforehand. Nevertheless, she was able to come up with expression of enriched sensibilities.    

   Her chromatic sensibility is capable of purifying every natural color. She was putting forth, infinitely, the stability, consolation and serene delight which she could draw from colors. Her moderation in producing the images of always even expressions, with no sense of excitement, astonishment or of verbosity, comes from the serenity of her mind. The depth of her thought as an artist can be measured in the density of her painting that attests to the fidelity of her work. For a while she was infatuated with the rigorous plane structure that came from geometric images. The explosive nature of this astonishing force of her there form is another aspect of her character. In that will power capable of moderating such wide-ranged emotions, we may detect the power stored inside her. She has kept the eyes of such cool consciousness for a while in dormancy and this internally stored power is expected to explode again in due time to come.  Colors have been softened in her recent works, turning to bright images of yellow tone. Again, she comes up with expressions, further simplified and almost effacing realistic images. Her work hour has been lengthened.  A sense of density, depth, which comes from her habitual act of repeating the same work over and over again, results in consolidating her plane in stability.  She now treads into the world which can be contemplated on by reasoning. Like a fruit which enhances its sweetness the longer it fully basks in sunshine, she now is in the process of furthering the maturation of her thought and philosophy.

‌장석원  Jang Seok-Won

‌미술비평, 전남대학교 교수|Art Critic 

시대를 초월한 마음의 표현-서양화가 전준자                          장석원


  전준자(全俊子)의 예술은 지금도 바다 가까이에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바라다보던 부산 앞 바다의 빛깔에서 큰 감명을 받아왔고, 서울의 미술수업(홍대)시대를 제외하곤 지속적으로 부산에 눌러 살고 있다. 70년대 초부터 부산여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현재 부산대) 15여년을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무엇보다도 고향인 부산 가까이에서 ‘바다’를 연상시키는 -부드럽고도 강하게 전달되어오는 깊이 있는 예술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특기할만한 관심을 모으게 한다. 지난해 그의 눌원문화상(’86미술부문)수상은 부산 유일의 민간문화상 족보에 드물게도 젊은 여류작가가 오르게 됨으로써 부산미술에 잠재적으로 끼친 그의 영향력을 입증하게 된 셈이다. 그의 작업실을 둘러보면서도 필자는 바다가까이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가 바다를 끼고 길게 늘어진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예술적 주변이(작품에서 느껴지는) 바다의 파도음을 귓가에 맴돌게 하는 것이었다.

  코발트블루(cobalt blue)와 울트라마린(ultramarine) 그리고 짙은 녹색, 그것들의 총합과 리듬이 그가 그린 형태의 변주곡 속에서 심도 있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최근의 작업에서 느꼈다.  이러한 회화성(繪畵性)은 회화자체의 심도 있는 울림에 천착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효과이다. 나는 아무래도 바다에 대한 상념을 저버릴 수 없었다. 오래전에 그가 써놓은 메모를 들춰보고서 그것에 대한 독자적인 상념을 확인할 밖에 없었다. 『70년대의 나의 작품은 서정적이었다. 그것은 내가 자라온 환경의 탓이었나 보다. 어릴 적부터 자라온 우리 집은 부산 보수산 능선 높은 곳에 있었다. 짙은 코발트의 현해탄을 발아래 깔고 맑은 날이면 대마도도 가끔씩은 볼 수 있었다. 밤이면 별과 달과 나무와 숲은 그린(green)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곳이었다.(全俊子, 공간, 1981년 5월호)』 그의 작업스타일은 60년대에 앙포르멜(Informel) 미술의 영향을 받은 이래, 색채의 비정형적(非定形的)인 울림을 중요시하면서 인간내면의 존재의 실체를 감지케 해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상의 시각적 형식에는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으며, 대상과 대상 또는 대상과 작가자신 속에 설정되는 「관계」를 포착하고, 이를 통하여 납득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코자 한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볼거리가 있고 밀접해질 수 있는 유의 것이다. 그의 그림은 1978년도 이후에 인간을 중심으로 「축제」(祝祭)시리이즈 형식을 띠게 되는데, 이는 1973년도 결혼 이후 인간적 삶 자체가 현실화되었을 뿐더러 ’78년도에 미국여행을 하면서 각종의 인간들이 다양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주제화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무렵부터 「군상」(群像)들이 나타나며, 이것들은 인간자신의 기념비적인 조형물일뿐더러, 때로는 기하학적으로 분열된 모습으로 때로는 푸른색계열의 해조음 속에 파묻힌 듯 한 완만하고 곡선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을 주제로 한 그림은 기념비적이고 직선적인 형태로부터 점차 곡선 적이고 리드미컬한 것으로 바뀌어 간다. 앙포르멜 이후로 그의 그림 속에는 늘 음악적 리듬이 따르고 있지만, 이 경우 대상으로부터 추출하여 가는 형태의 요약과 관련성에 기인하는, 자신의 생체적 원리에 가까운 호흡을 느낄 수 있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움직임이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기 때문에 다소 딱딱한 감은 흥분과 소음의 도가니 속에 빨려 들어간다. 움직임은 어떤 제한을 받지 않을 때 자연스럽지만 늘 음악에 맞추어온 우리에겐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全俊子, 같은 자료)』 그의 경우 인간 자신의 보편성을 표현하는 장(場)으로서 「祝祭」라는 개념이 이입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축제라는 시리즈 작업을 통해서 시ㆍ공간을 초월한 삶이 즐거움 그리고 살아가는 일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산다는 일은 원초적으로 기쁨일 수밖에 없고 기쁨으로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으로서의 긍정이다. 삶에 대한 원초적 긍정이 색(色)을 통하여 생동감 있게 전달된다. 색채와 형태의 이중주라고나 할까, 색채의 깊이 속에 언뜻언뜻 눈에 드러나는 형태들, 그것들은 순간적으로 거기에 담기게 되면서도 영원히, 오래 전부터 거기 있어온 듯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전준자의 대작들에게서 느껴지는 색채들의 진동은 바로 칠해지고 지워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생생함이다. 그려가는 중간에 얻어지는 기쁨을 건져내는 일은 「그리는 일」중에 중요한 일에 속한다. 여성적인 섬세한 시선으로 바닷물 속 깊은 빛깔을 찾아내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기에 그가 빌려온 군상(群像)들의 모습은 이야기하거나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아니고, 존재론적인 위상(位相)을 밝히는 것들이다. 확고하게 거기 서서 흔들리고 있는 모습들인 것이다.  흔히 인간은 역사적 궤적과 현실의 제약 속에서 정의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 자신을 느낄 때, 그것은 심성적인 것이고 존재론적인 것이다. 화가가 내면 깊숙이 침잠해 있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해간다는 일은 자기 자신의 진실과 속성을 숨기지 못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개인주의도 또 개성 위주의 것도 아니며, 솔직히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 그림이 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1973년 전준자는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이때의 작품들은 「作品1」,「作品2」…….등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었지만, 작품내용에 있어서는 추상성이 강하면서도 색채의 포근한 감성과 함께 환상적인 형태들이 보이고 있다. 그 자신 회화의 강렬한 의욕을 지니면서도 섬세하고 깐깐한 감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살아오는 동안의 체질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포근한 환상을 담던 이 무렵의 추상은 이후 인간을 담은 유기적 질서에로 옮아간다. 이 무렵(1973년) 결혼을 했다. 결혼 이후 인간의 삶과 인간 자신의 의미가 관심의 표적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활 주변의 공간과 내면성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의 「축제」시리즈가 시작된 것이다.  『‘축제’는 인간의 노력으로 인한 성취에 대한 기쁨이며 감사이며 풍년과 풍어를 하늘에 기원하는 제례이며 역신을 쫓고 다복을 염하는 살풀이이고 인간 차별의 반항의식을 슬픔과 폭력이 아니라 해학으로 승화시킨 교훈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 어느 것이나 바닥에 깔려있는 마음은 하나같이 밝고 즐겁다. 여기에 서로 다른 빛깔과 선의 교차가 무수히 오고가 내가 긋는 선이 되고 빛깔이 되어 캔버스를 메운다. (전준자, 부산미술, 1986년 겨울호)』

  축제 시리즈가 시작된 것은 1978년부터라고 그는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여행 때 받았던 강한 인상이 계기가 된 것이다. 오늘의 축제 시리즈는 보다 생명력 있는 것으로 회화적 요소와 결부지어지지 않는가 생각된다. 최근의 한 작업에서 필자는 지극히 추상적인 (인물이나 유추 가능한 형태들이 모두 배제된) 그림을 대하게 되었다. 매우 힘 있게 추상의 본질에 육박해 간 듯한 작업, 다시 말해서 색채(그의 색채 구사는 언제나 자신 있어 보인다)의 리듬이 그 자체로 충족되어 강렬한 인상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회화적 본질과 작가자신의 속성을 굳게 결부지은 듯한, 굳이 축제라는 주제에 붙여 이야기한다면 축제 그것을 보다 보편적인 어법으로 추상화시킨 유의 것이었다.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색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과 힘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려진 것의 속 깊은 진동을 느끼고, 이것을 삶 그것처럼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실 이젤 위에는 신라시대의 십이지신상의 사진이 붙어, 이제 막 캔버스 속으로 이입될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십이지신상의 모습에서 전통과 결부되는 인간의 모습을 읽게 되는 것 같다. 현재 살아있는 인간이나 시간을 초월하여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형상의 보편성이 그에게 있어서는 「형상의 본질」이라는 것과 동질적인 것으로 오는 듯하다.  오늘의 현실성이 그리 낙천적으로 보아 좋을 것도 없는 것임을 일깨울 때, 우리는 오늘의 미술이 갖는 「기능」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미술의 기능은 물론 미술의 형식과 내용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실성과 밀착된 질료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만으로 오늘의 미술이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를 채울 수는 없다. 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독자적 특질을 발휘해야 하면서도, 현실 저변의 질료들을 해석하여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졌다.

  미술작품의 진실은 시대를 초월하여 좋아할 수밖에 없는 미적요소에 있기도 하지만, 미술은 당 시대를 압축해서 대변할 수 있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설명적으로 시대를 주장하고 해부하기에 앞서서, 미술은 시대의 역기능적인 기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전준자의 예술도 미술의 본질에 천착해 가려는 절제와 극기를 계속한다는 점에서 「역기능적인 기능」을 추구하는 형이다. 말하자면 시대의 흐름에 초연한듯하면서도 시대성을 함축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축제시리즈는 모든 인간이 위계적 체계를 벗어나 인간 본연의 마당에서 만나고, 어울려, 삶의 기쁨을 노래하려는 것이다. 바다 물빛을 보면서,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그의 그림은 더 익어가는 것 같다. 삶은 좀처럼 삶 자체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예술 한 가운데에로 숨 쉴 수 있는 통로를 열게 되는 것이다.

Timeless Mental Expression-Painter Jun Joon-Ja          Jang Seok-Won


  The Art of Jun, Joon Ja is still nearby the sea. She was deeply impressed by the color of off Busan where she had looked over from her childhood. Except her study in Fine Arts in Seoul (Hongik University), she has settled down in Busan in season and out. She - the professor teaching students for the past 15years since the early 1970’s from the beginning of Busan Women’s University at present (Pusan National University) – shows a profound artistry with soft but strong feeling enabling us to associate the sea, which attracts public attention. Last year, she was awarded Nulwon Cultural prize (’86 Fine Arts Event) and it was rare for a young artist to be recorded on the genealogy of private cultural prize, the only prize in Busan city that proved her great influence on the Busan art circles.  Even her atelier gives me a realistic feeling of the sea. Of course such feeling may come from the geographical feature that Busan faces the sea in a row, but rather than, her paintings filled with artistic mood let the roars of the waves to turn around close to my ears.  I can feel from her recent paintings that the harmony and rhythm of cobalt blue, ultramarine, and deep green reverberates in her own musical variation heavily. It is hard to get such properties of paintings if not digging into the deep reverberation immanent in the paintings itself. I could not shake the conception on the sea off my mind. I could not confirm my personal conception on the seas after having opened her old memo. 『My work pieces in the 1970’s were lyrical. It might be the influence of growth environment. My home from my birth was placed at a hill of ridgeline of Mt. Bosu, Busan. The straits of Korea of deep cobalt spread itself below my feet and in a fine weather the outline of Daema Island had attracted my gaze. In the night, I could listen to the sound of green of stars, the Moon, trees, and forest there. (Jun, Joon Ja, Space, May issue, 1981)』  Since having been influenced by Informel in the 1960’s, her work-style stresses the vibration of atypical colors and at the same time let the identity of internal existence of a human being sense. For that reason she does not turn her attention to the outer of an object. She intends to evoke a reasonable sympathy through the capture of ‘relations’ created between objects or object and herself. Consequently her paintings give us the more spectacles and familiarity, whenever see her paintings.  Since 1978, her paintings have showed the pattern of “Festival Series” around mankind. According to her sayings, such tendency was caused by the realities of life after her marriage in 1973 and the US- sightseeing in 1978 that was an opportunity for her to experience men of diverse lives. Since then ‘Gun-Sang (large group of people)”was to show up in her paintings: Gun-Sang is the monumental sculpture of man, itself, which is described the object in the geometrically spilt form in some works and sometimes a smooth and curvilinearform as if buried in the boom of the waves with blue and green colors. Her paintings with the theme of a human being have changed from the monumental and liner form to more curvilineal and rhythmical.Since Informel, her paintings involve musical rhythm.It is possible to feel a breath matching to our bio-rhythm from the summing-up and relation extracted from the object. “Since the most primitive human’s motion matches to rhythm, a little stern sense is inhaled into the whirlpool of exciting and noisy. If there is no restrict in motion, it is natural but because we are accustomed to music in all times, it is seemed to us more nature. (JUN, JOON JA, the same source). Her work pieces are seemed to introduce the concept of “Festival” as the field representing the universality of a human being itself. This is because she draws the pleasure of life standing aloof from the world and time and the affairs leading a life into the area of art through her series works of “Festival.” That is to say, living is an affirmative that must be a pleasure from its root and must be expressed as a pleasure. The original affirmative on living is conveyed vividly through colors. It may be a duet of color and shape. The shapes appeared for an instant from deep colors. The shapes are included in her work piece in a moment but they are looked as if existed long ago or forever. The vibration of colors felt from the masterpieces of JUN, JOON JA is the vividness arising from the process of painting and wiping away. Picking up a pleasure in the middle of painting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in “painting.” She shows an ability of finding a hidden color in the deep sea with womanly delicate eyes. Thus the appearance of “Gun Sang” coming on her work pieces does not make a noise or is not clamorous but indicates the ontological presence. They are standing firmly there with shakiness.  In general a human being is defined in the limitation of historical track and actuality. But when a human being is able to feel itself, it will be the mental and ontological issue. If a painter carries on a dialogue continuously with his /her own ego from deep within, such a dialogue is caused when he/she can not hide his/her own truth and attribute. It is not included in the category of individualism or self-centered way of thinking but means the labor to be a picture for wishing to open as it is.  In 1973, JUN, JOON JA held her first private exhibition. At that time, her work pieces were entitled “Piece 1,” “Piece 2,” … Her work pieces showed a strong abstract with soft sense in colors and fantastic form. She has an intensive will to paintings but can not exclude her delicate and fastidious mind. This may be caused by her temperament deeply ingrained in her life for a long while. Her abstraction containing soft fantasy in those days shifts to the organic order containing human beings when she married (1973). According to her, human life and the intrinsic meaning of human beings was to show up as the target of her concern. For that reason, “Festival” series having unique atmosphere well-matched with the living space and inner description was to begin. 『”Festival” is the pleasure caused by the accomplishments, the results of human labor, the memorial services praying Heaven for a bumper harvest and a big catch, the exorcism wishing for great happiness and for expelling the evil spirit of smallpox, and the lesson sublimating the rebellious spirit of man discrimination in a jest, not sorrow or violence. Therefore all minds in the bottom are always right and joyful.  The countless crossing of lines different colors forms lines drawn by me and fills up the canvas ( JUN, JOON JA, Busan Fine Arts, Fall issue, 1986)』 According to her, Festival series was shown up in 1978. As mentioned above, one of the strongest motives of Festival was the impression while she traveled in the US. The Festive series of this day are seemed to me that they are connected with the elements with more powerful life force of painting. Recently I see a work piece that is so abstracted (excluding all analogical forms including character). The work piece comes close to the essence of abstraction forcefully: that is to say the rhythm of colors (her sense of color is used freely and confidently in all times) fulfills the expectation in itself and casts a strong impression. So to speak, in her work piece, the essence of painting is connected closely with the attribute of the artist herself. If speaking under the theme of Festival, her work piece abstracts Festival in a style of more universal expression. Whenever I enjoy her work pieces, I am always so completely absorbed in the infinite possibility and power of color itself. I can feel the deep vibration on her paintings and am willingly to accept them as the pleasure of life. There is a photo of the image of twelve horary deities on the easel of her atelier as if it sinks into the canvas. Suddenly the image of twelve horary deities gives me the life of human beings linked with tradition. The universality of form from the living to one of several hundreds ago where time and space have no meaning is seemed to her as the same thing to “the essence of form.” At the time of awakening the fact that the recent actuality has not so good aspect even from the optimistic view, we can not look over the “functional” issue of the modern fine arts. Of course the function of fine arts can not ignore the mode and content of fine arts but must show the substance adhered closely to the actuality. With “Art for art's sake” alone, the modern Fine Arts cannot meet the needs of times. This is the very time that the Fine Arts must display its peculiar characteristics and at the time is obliged to produce the results after interpreting the substances on the bottom of actuality. The true picture of Fine Arts work can be discovered from its aesthetic element that we cannot but admire in all times and the Fine Arts has an element of strength enabling to summarize the day and act as a spokesman of it. The Fine Arts has an inverse function for the times ahead to any assertion explaining and analyzing the times. In the point of following up on her moderation and self-control to dig into the essence of art, the Art of JUN JOON JA is included in the style of pursuing “the function of inverse function.” That is to say, she is seemed to keep aloof from the flow of times but includes the intent of implying the phases of the times. Her festival series intends that man is able to meet in the human natural place and sing the pleasure of life all together by casting off the order of rank. With seeing the color of seawater and listening to the sound of the waves, her painting is seemed to be ripened more and more. Life seldom betrays life itself and Life opens a pathway enable to breathe in the center of art.

전준자  Jun Joon-Ja

‌화가, 전 부산대학교 미술학과 교수|Artist 

‘축제’로서 추출해낸 서정적 순수성                                          전준자


  70년대의 나의 작품은 서정적이었다. 그것은 내가 자라온 환경의 탓이었나 보다. 어릴 적부터 자라온 우리 집은 부산 보수산 등선 높은 곳에 있었다. 짙은 코발트의 현해탄을 발아래 깔고 맑은 날이면 대마도도 가끔씩은 볼 수 있었다. 밤이면 별과 달과 나무와 숲은 그린(Green)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곳이었다.  이 속에서 나는 노래를 부르며 작품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여기가 나의 서정의 소산지이다. 또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음악을 듣는다. 슈베르트의 숭어가 놀고 차이코프스키의 백조가 잔잔히 흐르는 물결을 희롱한다. 조용한 숲, 마가렡꽃, 또 인물을 그려도 갸우뚱 고개를 약간 숙인 상반신의 소녀가 캔버스를 비집고 나온다. 이것이 나의 서정성을 띤 작품이다.
  태초에 神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인간을 창출해 놓았다. 인체의 각선미와 율동적인 움직임에다가 감정어린 표정은 나의 작품 소재로는 안성맞춤이다. 1978년도의 나의 미국 여행은 서정적이고 정적인 작품에서 강한 움직임을 동반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인종의 박물관이라는 뉴욕은 큰 사람, 작은 사람, 흰 사람, 검은 사람, 노란 사람들, 또 각기 다른 빛깔의 사람들, 그 움직임도 조금씩은 다른 것 같았으며 특히 인디언들의 의상이나 차림새는 나의 눈을 끌었다.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의 리도ㆍ쇼는 촌사람들의 관심을 살만 했다. 쇼걸의 의상은 눈부신 조명을 받아 더욱 휘황찬란했다. 잘 훈련된 춤은 넓은 무대 위에서 종횡으로 난무한다. 그때의 무희들의 움직임과 의상, 조명 등은 잘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한다. 브로드웨이의 쇼 캘커타는 좀 더 격이 높은 남녀의 누드쇼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어 나에게 많은 흥미를 끌게 했다.  
  詩나 소설의 많은 주제가 人間이듯이 나의 그림의 모티브가 사람 본연의 움직임으로 바뀌게 된 것도 거대한 미국대륙과 빌딩의 숲과 그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의 강물을 보고 인간의 움직임을 祝祭에서 연역해 본다. 소설에서 역사와 배경을 배제하면 남는 것은 순수한 인간이다. 그 순수한 인간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나의 작품은 나 자신의 심상의 표출이다. 美國은 땅덩이만 큰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도 컸었다. 세계의 많은 원작들과의 만남은 나의 작품규격도 크게 했지만 작품 제작의욕도 크게 부풀게 했으며 각오도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미국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많아 大自然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그러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러 선배작가들의 창작품을 대하면 人間의 위대함은 大自然의 그것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집요한 추구와 노력의 결과에 대하여는 경탄은 금치 못한다. 다만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祝祭」는 인간의 모든 노력의 결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그 결과에 대한 만족이며 그를 위한 종합예술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에는 즐거움과 환희만이 남는다. 축제에는 인간이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를 즐기기 위한 축제가 있는가하면 인간이 이루어 놓은 문명 내지 문화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있고 앞날의 역신을 이기고 풍년을 기구하는 종교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를 띤 「축제」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다 바닥에 깔려있는 마음은 하나같이 밝고 즐겁다. 여기에 서로 다른 빛깔과 선의 교차가 무수히 오고간다고 생각되면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흥분하게 된다. 빛깔과 선이 사라지기 전에 캔버스에 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축제가 각 지방의 특색과 전통을 살려 규모 있게 행해졌으면 싶은 마음 간절하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움직임이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기 때문에 다소 딱딱한 감은 흥분과 소음의 도가니 속에 빨려 들어간다. 움직임은 어떤 제한을 받지 않을 때 자연스럽지만 늘 음악에 맞추어 움직여온 우리에겐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일는지 모른다. 또 「축제」는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난다. 그렇다고 옛날에는 그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현대감각에 맞게 그 색깔이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祝祭」를 테마로 작품제작을 할 때는 나에게 걸맞지 않은 삼바나 디스코 음악에 몸을 흔들어 보기도 해 감흥을 돋워 본다.  하나의 線이 캔버스에 그어진다.  
  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와 세계와의 만남이며 나의 작품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앞으로의 나의 관심은 잘 정리된 듯한 고분의 벽화에서 축제의 분위기를 추출해 보고자 하는데 있다. 나의 대학원 논문의 테마가 「고구려 고분벽화의 연구」(부제: 특히 線과 다른 나라 고분벽화의 비교연구)였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무용도, 수렵도, 비천도, 사신도 등은 옛날 우리 선조들이 남긴 가장 귀중한 회화의 문화유산이다. 이 그림들은 사람과 상상 동물(의인화시킨 동물)의 강한 움직임이 표현되어 현대의 축제 분위기와는 너무나 흡사한 데가 많다. 여기에서 고대와 현대의 만남을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이 나의 앞으로 해야 할 과제로 정해 본다. 내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논문의 테마로 정한 것을 지금 크게 다행한 것으로 느끼며 흐뭇한 기분이다.  「祝祭」는 결과를 즐길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노력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Lyrical Purity Abstracted by the Festival                  Jun Joon-Ja

 
  My work pieces in the 1970’s were lyrical. It might be the influence of growth environment. My home from my birth was placed at a hill of ridgeline of Mt. Bosu, Busan. The straits of Korea of deep cobalt spread itself below my feet and in a fine weather the outline of Daema Island had attracted my gaze. In the night, I could listen to the sound of green of stars, the Moon, trees, and forest there.  There I used to sing and produce a lot of work pieces. There was the cradle of my lyricism. Whenever I am immersed in my work, I listen to music. The gray mullet of Schubert weaves and the swan of Tchaikovsky chaffs the wave flowing calmly. Calm forest, Marguerite, and a half-length young girl tilting her head go out of my canvas. These are my work pieces containing my lyricism.
  In the beginning of the world, human was created as the most beautiful existence in the world. The beauty of leg lines, rhythmic motions, and facial expression full of expression are the ideal materials for my work.  I had been to the United States in 1978 and the travel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direction of my work from lyrical and static mood to the mood accompanied by powerful motions. There were all kinds of persons, such as large-sized, small-sized, white, black, yellow persons and other colors in New York called the racial museum and furthermore they were seemed to have different motions. Lido Show in Las Vegas awakened a villager’s interest in full. The stage costume of showgirls was brightly lit by glittering stage lighting. Well-trained dancer threaded throughout the length and breadth of the wide stage. ‘Calcutta,’ a show of Broadway, was a high-dignity men and women’s nude show attracting my interest as it showed human true self.  
  As human is the theme of so many poems and novels, the motive of my paintings was to changed to the motion of human true self after seeing huge Americas, the building forest and the flow of a great crowd of people. I deducted the gigantic movement of a great crowd of people as a festival. The reminder excluding history and background from a novel is pure human. Such pure human is the very myself and my work piece is the expression of my mental image.  The United States has so large-sized work piece as well as large tract of land. The appreciation of the original works of the world serves as the incentive for large-sized work; strengthens the will to produce work piece; and makes me confirm my determination. Till now there are so many unexplored places in the United States and I am captivated the spectacular scene and beauty of Mother Nature. But the artworks of the seniors in museums or galleries make me impressed that the greatness of human is larger and more beautiful than those of Mother Nature. I cannot repress my wonder at the tenacious pursuit and the results of endeavor of human toward beauty. I do nothing but bowing my head.
  “Festival” is the proof of gratitude on the results of all human endeavor; the satisfaction on the results; and a general art for human endeavor. Here is only pleasure and gladness. There are some festivals: a festival is for enjoying the results of blood-and-tears endeavor; a festival is for memorizing the accomplished civilization and culture; and a festival is for desiring to overcome the evil spirit of smallpox and have a good harvest with the element of religion or superstitious belief. But every festival regardless of its pursuit is bright and pleasure without exception in the mind forming the foundation. If it is flashed into my mind that numbers of colors and lines come and go in the festival, I feel excitement at it as if a bewitched person because of my strong desire to embody them on the canvas before the colors and lines are disappear from my mind.
  I sincerely hope that in our country, such festival is holding by district according to its characteristics and tradition in large scale. Somewhat forced sense in motions caused by the most original human motion under the rule of rhythm is sucked into the whirlpool of exciting and noisy. The motion free from restriction should be natural but because we get used to move according to music, the motion under the rule of rhythm may be more natural to us. “Festival” smells strongly of contemporary feel. But it does not mean that there was no festival in old days but the color of festival has been changing according to the contemporary feel. While I produce a work piece with the theme of “Festival,” I raise inspiration by shaking my body to Samba or Disc that is not suitable for me. A line is drawing on the canvas.
  The meet to so many persons means the meet between me and world and my artworks world. It is the course of nature that stagnant water becomes foul. After this I would like to abstract the atmosphere of festival from well-arranged wall painting of old tombs. The theme of my master's thesis was “Study on Wall Painting of Goguryeo Old Tombs (subtitle: Comparative Study to Wall Painting of Other Country’s Old Tombs, particularly in Lines).” The Wall Paintings of Goguryeo Old Tombs, such as Mooyong-Do (Dancing Painting), Suryeop-Do (Hunting Painting), Bicheo-Do (Angel’s Flying Painting), and Sasin-Do (Four Animals Painting) are one of the most valuable cultural inheritances of our ancestry. Such paintings show human and imaginary animals (personified animals) and there are so many points similar to the contemporary festival atmosphere. For this reason, I am going to attempt to the meet between ancient times and modern times as my future task. I am happy that I wrote the master’s thesis on the theme of Wall Painting of Goguryeo Old Tombs.  “Festival” is a definite promise of endeavor in future as well as the present pleasure.

1981

개인전  Solo Exhibition / 신세계미술관Museum of Shinsegae 

‌유준상  Ryu June-Sang

미술비평, 전 서울시립미술관장|Art Critic 

사람과 움직임과 잔치                                                                 유준상

1
  全俊子씨의 미술에 관한 필자의 지식은 그의 서정적(敍情的)인 요소에 의해서 환기된 공감(共感)에 터전을 정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공감이라고 함은 더불어 느낀다는 뜻보다도 그 속에서 함께 느낀다는 정신물리학적인 프로세스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의 서정(敍情)은 그의 파도스를 실속으로 해서 구성되는 미술세계입니다만, 이러한 그의 주관적이 표현이 필자의 실속에도 공감하게 하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 파도스라는 정서적 요소(情緖的要素)는 말로 유비(類比) 하는게 거의 불가능한, 느낌의 기조(基調)를 가리키고 있으며, 엄밀하게는 조형미술 속에서만 나타나는 생명현상임은 주지하는 데로입니다. 가령 잔잔한 호수의 수면위로 떨어진 한 물방울의 충동이 둥근 파문을 일으키면서 그 호수 가득히 메아리치는 현상을 빗대어 생각해도 조겠습니다. 다만 이 경우의 서정(敍情)이라 함은 이러한 호수의 환계(環界)가 그 세계이며, 상대적으로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만 전기한 파도스의 파문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십 여년 동안의 全俊子씨는 이러한 하나의 물방울이였던 것이었습니다.

2
  이상의 전제는 미술이 가지고 있는 서정적(敍情的)인 특성(特性)에 관해서 全俊子씨가 추구해왔던 이제까지의 경과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또 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미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기조는 비단 인간생명에게서만 두드러지는 현상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나타내는 지각반응(知覺反應)으로서의 일반성(一般性)인, 횡적인 유대를 공감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령 한 마리의 누에가 명주실 같은 실마리를 토하여 한 아름다운 하얀 고치를 구성(構成)하는 경우로 이 문제를 빗대어도 좋겠습니다만, 이 경우 누에가 왜 실을 토하는지, 어떻게 그처럼 하얀 고치를 짓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건 뜻이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眞理)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生命)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생명은 진리보다 원초적(原初的)이며 바른 것입니다. 거듭 말하여 누에고치의 구조(構造)는 논리를 선행해서 생존(生存)에 의해서 결정(決定)되는 형식(形式)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한「뜻이 있다」는 말은 논리적관련(論理的關聯)으로 이해되는 범주는 아니며, 생명이 나타내는 최심최오의 구성적인 반응으로서의 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에의 환계가 뽕나무 잎이라는 제한된 세계로 한정되는 것이듯이, 인간의 서정(敍情)도 그 속에 빠져버릴 외좁은 세계관으로, 생애(生涯)를 마칠 단순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추상회화인, 누에의 실마리 같은 생명(生命)의 궤적(軌跡)이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3
  근자에 와서 全俊子씨가 보여주고 있는 예술의 면모는 「축제(祝祭)」에 관한 시리즈입니다. 말하자면 잔치의 형식을 통해서 전망하기 시작한 생명에의 새로운 투시(透視)를 그는 제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잔치는 움직임이며 여럿이 모여서 떠들썩하게 엇갈리는 서정(敍情)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그것은 「나」만의 움직임은 아니며 「우리」의 움직임인 것입니다. 따라서 축제(祝祭)가 상징(象徵)하는 것은 어떤 「개체(個體)」가 아니라 「개체(個體)의 작용(作用)」들이 모여서 나타내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構成)하는 유발(誘發)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듯이 한 움직임이 또 다른 움직임을 유발하여, 같은 마당에서 같은 움직임이 하나의 전체(全體)를 이루며 생명(生命)의 뜻을 서로 확인(確認)하고 유발(誘發)하는 공동체(共同體)의 체계(體系)가 여기에 있습니다. 축제(祝祭)는 그렇기 때문에 삶의 뜻을 실체화(實體化)하는 마당이며, 이 마당의 영역(領域)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관심(關心)과 가치(價値)에 관한 유발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처음 인간이 자연과 맞닥뜨렸을 때 그 느낌을 몸짓으로 나타냈으며, 이러한 몸짓인 무의식적인 감득은 모든 추상(抽象)의 근원으로서의 첫 분절(分節)을 엮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엮음새의 결과를 어떤 법칙 이라던가 체계로 관념(觀念)하는 오랜 습관 속에 사람들은 살아왔던 것입니다.서정(敍情)은 잔잔한 호수 같은 세계이며 그 수면은 한 사람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 교류(交流)는 언제인가는 바다로 흘러들게 마련이며 여기서의 움직임은 크고 억센 파도를 헤쳐 나가면서 삶의 방향과 삶의 중력을 유지해야만 됩니다. 다르게 말해서 반대세력 때문에 위태로워지는 생존(生存)을 통해서 그 움직임은 비로서 개성(個性)을 자각하게 되고 실제로도 경고해진다는 뜻입니다. 오늘 全俊子씨는 이러한 교류(交流)에 그의 서정(敍情)의 돛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미술을 향한 그의 항로(航路)를 크게 수정하기 시작했다는 증좌이며, 그의 속에 점차로 유발되기 시작하는 인간(人間)의 문제와 그들이 모여사는 삶의 형식(形式)에 관해 새로운 시각(視角)을 설정했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필자는 십 여년에 걸친 그의 경과를 알고 있으며, 이러한 인과로 해서 그의 앞으로의 먼 원근(遠近)을 조심스레 전망하고 싶은 것입니다.

 Man, Movement, and Feast                                   Ryu June-Sang

1
  As far as Jun Jun-ja’s art is concerned, I feel sympathy for its lyricism. Sympathy that is a spiritual process through which we feel together. Jun’s lyricism is an art world, based on her pathos, but her subjective representations have elements I feel sympathy with. It is almost impossible to express this lyricism, this pathos, within language. As is widely known, it is a life phenomenon, and it only appears in figurative art. It can be likened to a phenomenon like a drop of water, falling on the lake, so the surface raises ripples and spreads. Ripples of pathos spread only in this world. Jun has worked with water drops like this for the past 10 years.  
2
  Jun’s pursuit of lyricism and its process is mentioned above. It is like, commenting on art as a biological phenomenon. Such a phenomenon is applied generally to the interpretation of all creatures, not only to man, and exemplified in the situation of a silkworm spinning cocoons. It is of no significance to explain logically why the silkworm spins a cocoon. It is a matter of life, not a truth more essential and righter than life. In other words, a cocoon structure is life itself, and not logical. Just as the silkworm lives in small mulberry leaves, humans feel lyricism through a narrow field. Through abstract painting, the traces of the silkworm shares its problem.
3
  Recently Jun Jun-ja showed change in her work in the Festival series.She presented a new perspective on life in the form of a festival. Within it, a feast is a movement, as well as an operation, of a lyricism, where people gather and exchange. It is not my movement but our movement. What the feast symbolizes is the formation of the whole, not an operation of individuals. Just as an idea recalls another idea, a movement brings about another movement. In a communal system the same movement forms a whole, confirms it, and generates life-meaning. A festival is thus a forum for substantiating the meaning of life. The sphere of the forum is decided relatively by human concern and value. When encountering nature for the first time, people express their feelings in gestures. Such gestures, showing unconscious inspiration, is the source of all abstraction, brought about by weaving an artwork for example. As a result of the weaving, people came to live in a system, or within a principle.     Lyricism is a placid world like the lake whose surface enables one to move freely. Through this movement, one overcomes wild waves, maintaining the direction and gravity of his or her life. In other words, through this movement, one comes to realize his or her personality and makes it solid. Jun Jun-ja today begins advocating lyricism again. It means she alters her route, seeing human issues and forms of collective life from a new perspective. I have known her 10-year pursuit and based on this, I would like to prudently forecast the path she will take in the future.

‌오광수  Oh Kwang-Soo

미술비평, 전 국립현대미술관장|Art Critic 

全俊子 近作展에 부쳐                                                              오광수  


  예술은 개인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예술이 한 시대의 반영이니 그 산물이니 하지만 그것은 개인에서 출발되어 주위로 넘쳐나면서 생겨난 정의일 따름이다. 어떤 집단적 예술양식이라도 일단은 개인적 단위의 확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그러한 집단은 있을 수 없다. 최근에 들어오면서 미술에 있어서 특히 개인의 문제가 다시금 상정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예술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의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는 여기서 그 개인으로 대변되는 개선의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全俊子씨의 지금까지의 활동과 최근 작품들을 일벌해 볼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러한 개성의 문제이다. 그는 출발에서부터 이러한 의식을 강하게 노출한 것으로 기억되며, 그것이 최근에 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점은 어떻게 보면 지나친 시대적 미의식에 민감하지 않고 자기작업을 꾸준히 지속해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감성이 풍부한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이 같은 시대적 미의식에의 강박적인 유혹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선 주위로부터 낙오된 인상을 준다는 것이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신을 고수한다고 해서 편벽한 자기형식의 굴레 속에 빠져 경화된 모습을 보이는 작가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까 개성이란 단순히 자기 일만을 고집한다는 편협한 개념으로 단정할 수가 없게 된다. 全俊子씨의 작품과정이나 최근 작품을 보면서 특히, 그가 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어떻게 자신을 꾸준히 밀고 나올 수 있었던가를 음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지나치게 편협한 자기형식이나 강박적인 시대미감의 추종에 의하지 않는, 그러면서 자기세계를 확립해가는 꾸준한 방향에의 의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신뢰를 자아내게 한다.
  그의 최근작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구체적인 형태를 강하게 내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의 형태란 단순한 의미의 대상적 형태라기보다는 화면을 구체적인 형태로의 구성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구성적 요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群像이다. 많은 인간들이 얽히고 겹치면서 부상된다. 하지만 이 군상들이 단순한 소재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화면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의 구조적인 문제로 환원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구체적인 이미지의 재확인이라든가, 형태의 해체와 종합의 환원적 작업이라든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그러한 대상적 의미를 뛰어넘어 보다 밀착된 화면의 평면성에 대한 문제와 맞딱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지금까지 꾸준히 다루어 온 정감 짙은 소재나 표현적인 심화에서 보다 力動的인 구성적 의지에로 경도되는 변화를 포착하지 않는 건 아니나, 우리가 그의 화면을 보면서 의식해야할 것은 그러한 인간들의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뿜어지는 온갖 삶에의 긍정적인 자기표현을 앞질러 화면자체의 구조적 현실에 대한 강한 자각과의 만남이지 않는가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우리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무제를 그 나름대로 조용히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Jun Joon-ja Exhibition for Recent Works             Oh Kwang-‌Soo


  The onset of art lies in each individual. Although art is a reflection of an age, or its outcome, it departs from each individual and fills his or her surroundings. Any collective artwork is made through an extension of each individual, and cannot exist without going through this process. Recently, works of art have raised the issue of individuality, reconfirming the fact art begins from the individual. Let us recall this problem of individuality, actively discussed below:  
  In a glimpse of Jun Joon-ja’s activity and her recent works of art, what first strikes us is the matter of individuality. She had consciousness of this problem early on, and has recently returned to it. She has consistently pursued her own style, without being over-sensitive to the aesthetics of an age. It is not easy for artists like Jun, of a younger generation, with abundant sensibilities, to break away from obsession or temptation for such aesthetics. It is also hard to endure feeling they are falling behind, by not following such aesthetics. Of course, there are also many artists bound to narrow, biased, standard forms.  We can see how she has persistently sought out her own style in her work process and art works. Jun has steadily achieved her own visual world, without obsessively pursuing any excessive, narrow-minded form, or the aesthetic sense of an age.  
  Jun’s recent art works are particularly characterized by concrete form. Form that does not refer to any objective shape, in a simple sense, but form that is a compositional element of her canvas. In one canvas a group of people appear as this compositional element in her work. A number of people seemingly entangled or overlapped, emerging out of the canvas. However, while looking, we need to reduce them to a structural problem, about how to properly view a canvas, not simply as subject matter or an object. So, when viewing such a canvas, it is not significant to reconfirm any concrete image, or to focus on any deconstruction or synthesis of form, because Jun is interested in the matter of two-dimensionality, transcending the meaning of the object. We capture some change in her art from emotional subject matter and profound expression to a dynamic composition. But, what we have to perceive is the tales a group of people convey and diverse positive expression of life. In this respect, I consider Jun is one of the artists who strive to solve the issues we face in our times.





1979

개인전  Solo Exhibition / 원화랑  Gallery Won 

이시우  Lee Si-Woo

미술비평|Art Critic 

농담이 번지는 상쾌한 정취                                                        이시우


  지난여름 전준자씨는 아메리카 각 지방을 순회하였다. 촉박한 여정에 쫒기면서 고달픈 여수를 화필 달랜 것이다. 생소한 미국의 풍정을 자기 나름으로서 회화적 표현으로서 수채화로 추구한 것이다. 수채화는 유화에 비해 많은 제한과 속박을 받는다. 재료의 특징을 잘 이용해 나가는 데에 요령이 필요한 것이다. 이분의 수채화는 원칙적인 화지의 흰 바닥을 가장 높은 광의 부면으로 하여 채색을 투명하게 하는데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안료의 틈 사이로 언듯 언듯 보이는 하얀 생지(生地)가 한결 투명감을 던진다. 자연이란 인간과는 별개의 생명과 구조를 지닌 많은 것에 둘러싸여 존재한다. 몇 세기를 두고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호기심과 외경의 염을 불러 일으켰다. 또는 희열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자기의 기분에 반영하도록 상상력 속에서 거듭 창조해 왔다.
  풍경화라는 것은 이 자연에 대한 각자의 생각하는 여러 가지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외계의 사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 즉, 인간의 「一般意識」의 일부인 풍경화의 단계를 상징적 풍경 사실의 풍경, 환상의 풍경, 이상적 풍경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의 진실한 모습에 대한 권태를 모르는 겸손한 마음에서 아메리카라는 지구의 현실 속에  묻혀있는 매력을 경험한 전준자씨의 작품은 바로 「事實의 풍경」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 건실한 힘과 변화 있는 景感.스피디한 역동감은 작가의 메커닉한 신경이 번뜩여 뽀오얀 안개 속에서 반점이 번져 우연한 放物線을 그린다. 재료의 성질을 자상히 알고 다루었기 때문에 표현하려는 이미지의 세계는넓어진다. 안료에 물이 스며 종이에 젖어서 흡수되는 색의 묘한 맛은 유회(油繪)와는 또 다르게 아름다운 것이다.

Refreshing Taste Spread in a Penumbra        Lee Si-Woo


Last summer, Jun Joon-ja traveled to many areas of America, refreshing her senses and soothing her melancholia. During her journey she captured exotic scenes in watercolor representations. Being more restrictive than oil, watercolor requires dexterity to exploit its attributes. In Jun’s watercolor painting, colors appear transparent, when the white ground reflects the light.
  The white appears suddenly between pigments, and also appears transparent. Likewise, nature has coexisted within humans, embedded with life forms within its diverse structure. It has also stimulated our curiosity and sense of awe for many years. Admiring it, and being inspired by it, it reflects our feelings onto it, like light, and repeatedly represents them in our imagination.  Landscape painting reflects an artist’s meditations on diverse aspects of nature. It reflects humanity’s response to external objects, and can be divided into symbolic landscape, realistic landscape, imaginary landscape, and ideal landscape. Jun’s work, featuring her experience of the magnetism of America, can be classified as realistic landscape.  
  Jun’s work, rendered in a sense of solid strength, variable emotion, and a sense of vitality, appears spread out or shrouded in mist. As Jun is adept with materials she uses, she can extend the world of the images she represents. Resulting exquisite hues, brought about when pigments are soaked in water, offers beauty different to that of oil painting.

1977

개인전  Solo Exhibition / 현대화랑  Gallery Hyundai

‌오광수  Oh Kwang-Soo

미술비평,  전 국립현대미술관장|Art Critic 

전준자씨의 근작을 보고                                                             오광수

 
  全俊子씨는 抽象表現主義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자신의 체질로서 재해석한 독특한 조형언어를 보여주는 드물게 보는 여류작가의 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이 한 시기의 예술로서 받아들여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유행을 찾아 재빨리 도피해 버리는 예들에 비해서 그는 자신의 출발과 과정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서 자신의 방법을 유추해낸 체질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최근작들을 보면 그가 걸어온 과정의 성실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그가 체질적인 작가였구나 하는 심증을 더욱 굳게 한다.
어느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의 미술계는 한 사람의 체질적인 작가보담 국제적 경향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반응을 가지고 있어 진중한 작가의 성장을 기대하기는 더없이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더구나 젊은 작가들이 자기의 고유한 조형언어를 조탁하기에는 그 어려움이 배가되어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전준자씨의 그 동안의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를 유추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 이다.
이번 근작들은 과열된 의식이나 넘쳐나는 욕심이 없이 더없이 담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자기 언어에 대한 자신감 같은 기미도 포착되어진다. 이 말은 생경한 논리나 오브액션이 없이 자신의 방법이 삶의 한 양태(樣態)로 자연스럽게 들어와 앉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그린다는 자체가 삶의 극히 자연스러운 일부로서 소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모티브 역시 극히 자연스러운 日常에서 무리 없이 취재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일상적인 事象에서 회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영상의 의미를 추적해보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예술이 생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건강한 시각의 발로이며 이와 같은 건강한 발판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둘려는 염원을 되새기게 하고 있는 것이다.

Jun Joon Ja’s Recent Works                                   Oh Kwang-Soo


  Jun Joon-ja is a female artist who has showcased her abstract expressionist art world in her own unique formative language. Unlike many other abstract expressionists, embracing this artistic tendency as the passing vogue of an age, soon moving to another fashion, Jun has an innate artistic talent, whose art began from this art movement, until she developed her own style out from it. Jun’s recent works show the path she has so far taken, with sincerity, assuring us she is a natural talent.
In a sense, because the Korean art scene responds so sensitively to international tendencies, it is to a degree unfavorable for fostering serious, persistent artists. Young artists are placed in an unfavorable situation, when trying to polish their own unique language. Therefore, we can appreciate the many difficulties Jun must have gone through.
Jun’s recent pieces appear in a plain atmosphere, without showing any excessive awareness or overflowing desire; they indicate her confidence in her own visual language. This means she embraces her artistic method as an aspect of her life, without any die-hard logic and over-action. That is, the act of drawing is part of her life. Jun takes her motifs from daily life, pursuing the meaning of a pictorial image, which can be said to be the true nature of painting. Jun’s art derives from her positive attitude toward life and signifies her will to put the meaning of her life into a healthy footing.

1973

개인전  Solo Exhibition / 부산 데파트  Busan Depart

김강석  Kim Gang-Seok

미술비평|Art Critic 

서정적인 내면 풍경-전준자 유화전                                           김강석

 
 
 전준자 유화전의 작품 경향은 대체로 서정적인 구상화풍과 비구상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친근한 일상생활에서 주제를 찾아 그것을 까다로운 회화이론에 구애되지도 않으며 딱딱한 사실에도 신경을 쓰지도 않는 샤갈풍의 초현실적 구상이었다. 그것이 해가 바뀔수록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차츰 옮겨지고 있다.
그러나 주제의 선택은 시종 생활의 주변에서 보고 겪은 현실과 꿈과 환상과 애정과 고독과 애환 등의 내적 풍경을 앤티믹하게 그렸다. 능숙을 부리겠다는 것보다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그리겠다는 의도에서 그려진 작품들에게는 아무렇게나 그려진 듯 하면서도 그 밑바닥에는 생활에서 얻은 삶의 의미를 흥취하거나 홀로 일종의 애수에 잠겨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품에 따라선 문학적인 설명성이 요설(饒舌)하여 시적이라고 말하기보다 산문적이며 또한 여성적인 감흥이 치우친 것도 있다.
그리고 소품은 전시장의 순수한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념적이라고 말하기보다 앤티미스트인 이 젊은 여류화가는 내연적이며 정조(情操)적이며 주관적이며 매우 꾸준하고 의욕적이다. 기대를 걸고 싶은 여류화가다.

Lyrical Senses of Mind-Jun Joon Ja’s Oil Painting Exhibition   Kim Gang-Seok


The traits of work pieces in JUN JOON JA’s Oil Painting Exhibition is able to divide into lyrical representational style and nonrepresentational one.
The theme of her early works came from everyday life and was expressed by surreal representation in the Chagall style free from complicated painting theories and regardless of strict realism. With the years, however, her works has shifted from representational style to nonrepresentational one gradually.
But her theme is selected constantly from her inner scenes, such as experience, dream, fantasy, affection, loneliness, joys and sorrows occurred around living surroundings. From a work piece drawn in the intent of expressing it naturally and softly rather than technical, we can taste the implication of life obtained in everyday occurrence or feel what is merged in a sentiment of sadness from the ground up though it may be seemed to be drawn at random. There are some work pieces leaning toward prose style or feminine inspiration rather than poetic inspiration since literary explanation is loquacious.
The properties make the pure atmosphere of exhibition vague. This young female artist who is Intimist rather than ideological, is internal, sentimental, subjective, very steady and highly motivated. I cherish great expectations for the future of this young female artist.

1973

개인전  Solo Exhibition / 신세계미술관  Museum of Shinsegae

이 일   Lee Il

미술비평|Art Critic 

전준자 유화 작품전                                                                                               이  일


  흔히 ‘여류’라고 했을 때, 이 말이 지니는 어떤 제한, 아니면 특권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기는 화가로서 ‘여류’라는 꼭지가 반드시 붙어 다닐 이유는 없다. 그러면서도 체질적으로나 감수성 또는 대상의 포용력 등에 있어 여성은 어쩔 수 없는 제약을 받고 또 반면에 일종의 묵계에 의한 관용이 베풀어져 왔다는 것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대 여류 화가관’ 인 것 같다. ‘전준자(현재 부산여자대학 조교수)씨의 경우 그러한 제약과 관용을 제쳐 놓고라도 한 사람의 화가로서의 충분한 재질을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을 작가로서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 번 서울의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은 일백호 짜리를 중심으로 한 대작 30점이라는 보기 드문 규모의 것이었다. 그 중에는 1968년도의 구작이 더러 끼어있기는 하나 모두가 분명한 의도아래 또 때로는 매우 대담한 구도를 시도한 작품들이었다.
이 작품은 비교적 최근에 속하는 작품으로 이와 비슷한 일련의 추상작품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이 색채에 대한 몹시 델리게이트한 감성이기는 하나 그것이 너무 감각적으로 흘러 보다 깊은 내면적 탐색이 아쉽게 여겨진다.

Jun Joon Ja’s Oil Painting Exhibition                                                        LEE  IL

  When we say ‘womankind’ popularly, if there is any restriction or privilege in the word, what is it? In fact there is no need that the word of ‘womankind’ persistently chases a lady painter. Nevertheless it may be ‘the outlook on lady painter” of our country that womankind is unavoidably under restrictions on the aspect of physical constitution, sensibility, or magnanimity of an object and on the other hand generosity under on a tacit understanding is allowed in all cases. In case of ‘JUN, JOON-JA (At present the assistant professor of Busan Women’s College),’ regardless of such restriction and generosity, she is highly gifted as an artist and is seemed to have the ability to realize her gift as the artist.
She held her first exhibition in Seoul with 30 pieces of large-scale work including 100-ho size, which is rare. Some old works are included in the exhibition but every work tries out daring composition under a clear intention.
This work is belonged to her recent works and the first impression from this work, which is a piece of series of abstract paintings, is the delicate sensibility on color, but the sensibility flows sensuous, so it is too bad that it lacks deep inner investigation.